
36개국의 정전 기록을 5년치 펼쳐놓고 보니, 태양광과 풍력을 늘린 나라일수록 불이 더 자주 꺼진다는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재생에너지 팩트체크 플랫폼 리팩트(Refact)가 23일 내놓은 보고서의 결론이다.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대정전이 발생한다'는 널리 퍼진 주장에 이 보고서는 '대체로 사실 아님' 판정을 내렸다.
분석 도구는 세계은행이 집계하는 계통평균 정전지속시간 지수(SAIDI)였다. 한 해 동안 소비자 한 명이 평균 몇 시간이나 정전을 겪었는지를 나타내는 값으로, 2015년부터 2019년까지 OECD 회원국 36개국의 변화가 재생에너지 비중 변화와 나란히 놓였다.
결과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이 기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늘어난 32개국 가운데 17개국(53.1%)은 오히려 정전시간이 짧아졌다. 영국·일본·프랑스·헝가리·에스토니아가 여기 속한다. 정전시간이 길어진 나라는 13개국(40.6%)으로 미국·아일랜드·네덜란드·뉴질랜드 등이었고, 한국과 독일 두 나라는 변동이 없었다.
개별 사례를 들여다보면 통념은 한 번 더 흔들린다. 리투아니아는 5년 사이 재생에너지 비중을 28.15%포인트나 끌어올렸는데, 늘어난 정전시간은 36초(0.01시간)였다. 반대로 스위스는 재생에너지 비중을 3.26%포인트 줄이고도 정전시간이 3분가량(0.06시간) 길어졌다.
그렇다면 실제 대정전은 왜 일어났을까. 국제 연구기관 제로 카본 애널리틱스(ZCA)가 2005년부터 2025년까지 세계 주요 대정전 20건을 뜯어본 결과, 가장 자주 등장한 원인은 노후 장비를 포함한 인프라 결함으로 11건이었다. 인적 오류가 6건, 자연재해와 극한기상이 5건, 투자 부족이 4건으로 뒤를 이었다. 전력망 과부하·불안정이 지목된 사례는 3건에 그쳤다.

논쟁의 한복판에 놓인 이베리아반도 사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덮친 대정전을 두고 유럽 송전계통운영자 네트워크(ENTSO-E)가 최종 조사보고서를 냈는데, 방아쇠가 된 전압 상승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무효전력 전달 부족, 동적 전압 제어 기준의 공백, 인버터 기반 설비의 불안정성을 비롯한 14개 요인이 겹쳐 작동했다는 것이 조사팀의 설명이다.
정작 스페인이 택한 길은 후퇴가 아니었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그대로 끌고 가면서,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동적 전압 제어 서비스를 담당하도록 관련 규정을 손봤다. 설비 증설도 느려지지 않았다. 대정전을 겪은 뒤인 2025년 5월에서 2026년 2월 사이 풍력·태양광은 월평균 1.3GW씩 새로 들어섰는데, 그 직전 1년의 월평균 1.2GW를 넘어선 수치다.
세계 전력 설비의 흐름 자체가 그쪽으로 기울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민수 에너지기술연구조합 연구위원은 2025년 한 해 전 세계에 새로 지어진 발전설비의 85.6%가 재생에너지였다고 밝혔다. 발전원을 놓고 다투는 사이 막상 손봐야 할 대상은 그 전기를 받아 실어 나르는 망과 그것을 움직이는 시장 규칙이라는 이야기다. 보고서 검토에는 전영환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가 참여했다.
전력망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변전소도 송전선도 대개 도시 바깥에 있고, 고장이 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다음에 대정전 소식이 들려올 때, 발전원부터 의심하기 전에 그 나라가 지난 10년간 낡은 설비를 얼마나 갈아 끼웠는지 한 줄만 찾아보길 권한다. 답의 대부분은 그 줄에 적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