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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재생 학회가 함께 낸 한 장의 제언

김범수·입력 2026. 06. 07. 오후 3:11:00
12차 전기본 앞두고 3개 학회 공동 정책제언, 대립에서 설계로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상호 보완 전원으로 본 공동 제언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상호 보완 전원으로 본 공동 제언 / ⓒ 브레스저널

대한전기학회, 한국신·재생에너지학회, 한국원자력학회. 지난 10여 년간 국내 에너지 논쟁에서 서로 다른 편에 서 있다고 여겨져 온 세 학회가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을 앞두고 하나의 정책제언서에 이름을 나란히 올렸다. 발표는 이번 주 초다.

문건의 첫 전제는 간명하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는 함께 늘려야 할 두 축이라는 것이다.

세 학회는 우리 전력 부문이 풀어야 할 문제를 '에너지 트릴레마'로 규정했다. 에너지안보 강화, 탄소중립 실현, 산업경쟁력 확보. 이 가운데 둘만 고르는 방식으로는 어느 하나도 지키기 어렵다는 인식이 공동 발표의 출발점이 됐다.

제언이 요구한 것은 방법론이다. 공급 특성, 경제성, 계통 안정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과학적 모델링을 근거로 전원 구성을 짜라는 주문이다. 특정 전원의 비중을 정치적 선언으로 정하지 말고, 계통이 실제로 견디는지를 따져 도출하자는 것이다.

제언에 담긴 수치는 그 방법론이 어떤 규모의 실행을 요구하는지 보여준다. 학계 분석에 따르면 2050년 원전 비중을 35%로 유지하려면 신규 대형원전 20기와 SMR 12기가 필요하다. 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리려면 대형원전 34기와 SMR 20기가 있어야 한다. 세 학회는 2039~2040년 가동을 목표로 한 추가 대형원전 2~4기와 SMR 2~4기 계획을 제12차 전기본에 반영하라고 요구했다.

재생에너지 쪽에 대한 요구도 원전 쪽 요구와 같은 수준으로 구체적이다. 제언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르는 프로파일 비용, 균형 비용, 계통 비용, 유연성 비용 등 추가 시스템 비용을 경제성 평가에 반영하라고 권고했다. 동시에 재생에너지가 만들어내는 환경적·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 체계도 함께 세우라고 요구했다.

해안 풍력단지를 잇는 간선 계통이 전환의 병목으로 지목됐다
해안 풍력단지를 이어 주는 간선 계통이 전환의 병목으로 지목됐다 / ⓒ 브레스저널

계통 부문의 제안은 구체적이다.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상풍력단지를 연결하는 HVDC 기반 '에너지고속도로' 구축을 우선 추진 과제로 제시했고, 대규모 해상풍력 클러스터와 공동접속 허브를 국가가 주도해 만들어야 한다고 봤다. NDC 달성에 필요한 전력망 확충 계획을 전기본 안에 명시하라는 요구도 함께 담겼다.

저장 분야에서는 시간축을 나눠 접근했다. 단기적으로는 배터리 기반 ESS로 계통을 안정화하고, 장기적으로는 양수발전과 청정수소 저장 같은 비배터리 기술을 단계적으로 넓히라는 것이다. 정부에는 ESS를 국가 무탄소에너지 인프라로 인식해 재정 지원·정책금융·세제 혜택을 강화하고, ESS가 가상송전선로(VPL) 자원으로 쓰일 수 있도록 제도를 손보라고 제안했다.

전기로 바꾸기 어려운 영역도 빠뜨리지 않았다. 철강·석유화학·시멘트처럼 전기화가 곤란한 산업 부문에는 청정수소와 CCUS를 활용한 별도의 탄소중립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 진영이 자기 전원의 약점을 스스로 짚은 부분도 눈에 띈다. 원자력은 탄력운전 기능 확보와 입지·대규모 송전 문제를, 재생에너지는 국내 기술 기반의 공급안정화와 산업생태계 확보를 과제로 올렸다.

물론 제언은 제언이다. 세 학회가 요구한 신규 원전 규모도, 계통 투자 계획도 제12차 전기본에 그대로 담긴다는 보장은 없다. 원전 비중 35%와 50%가 발전량 기준인지 설비용량 기준인지도 문건에 명시되지 않아, 앞으로의 논의에서 정리돼야 할 부분으로 남는다.

제언에는 달라진 지점이 있다. 지금까지 국내 에너지 토론은 어느 전원이 옳은지를 겨루는 데 대부분의 힘을 썼다. 세 학회가 한 문서에 서명하면서 쟁점이 이동했다. 앞으로의 논의 대상은 송전선을 어디에 놓을지, 시스템 비용을 어떻게 계상할지, ESS 지원을 어느 수준으로 할지 같은 설계의 문제다.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앞으로 몇 년간 국내에서 쓰는 전기의 성분을 결정한다. 계획 수립 과정에서는 공청회와 의견 수렴 절차가 열리고, 여기에는 전문가만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지역에 송전선이 지나가는지, 해상풍력 단지가 들어서는지, 그 계획이 어떤 근거로 짜였는지를 확인하는 일부터가 참여의 시작이다.

김범수 기자 · Breath.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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