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한쪽으로 누운 억새

배진경·입력 2026. 08. 23. 오후 7:44:00
바람은 찍히지 않고 이삭의 각도로만 남는다
지나간 것은 이삭의 각도로만 남는다
지나간 것은 이삭의 각도로만 남는다 / 사진 https://kaboompics.com/ · Pexels

억새 이삭 하나가 화면 왼쪽 위로 혼자 솟아 오른쪽으로 허리를 꺾었다. 그 아래 이삭들도 하나같이 같은 쪽으로 누웠다. 하늘은 색이 거의 빠진 회색이고, 강 건너 언덕에는 침엽수의 짙은 초록과 물든 자작나무의 노랑이 얼룩처럼 섞였다. 볕이 없는 흐린 낮, 마른 밀빛 이삭이 화면 아래 절반을 통째로 채운다.

바람은 찍히지 않았다. 잎 끝이 그어놓은 가는 선과 한쪽으로 쏠린 이삭의 각도만 남아, 방금 무엇이 지나갔는지를 알려준다. 이삭 끝을 눈으로 오래 좇다 보면 초점이 자꾸 미끄러지고, 그러는 사이 어깨가 귀에서 조금 멀어지며 들숨이 한 박자쯤 길어진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아 있다는 감각도 그제야 돌아온다.

붙잡아두려고 힘을 주던 마음이, 저 휜 등을 보는 동안 손아귀처럼 조금 헐거워진다.

창밖에 흔들리는 것이 하나라도 보인다면 삼 분쯤 눈을 두어도 좋다. 나뭇잎이든 빨랫줄이든 지나가는 사람의 옷자락이든, 흔들리는 폭이 커졌다 작아지는 동안 눈만 따라가면 된다. 무엇을 알아내려 애쓸 필요는 없고, 바람이 그치면 그친 대로 본다. 삼 분은 커피 한 잔이 식기에도 짧다.

같은 일을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도 해볼 수 있다. 접시에 부딪힌 물줄기가 갈라지는 모양을 잠깐 따라가는 동안, 턱에 힘이 들어갔는지 한 번 살핀다. 굳어 있으면 굳었구나 하고 넘어가고, 느슨해졌으면 그것도 그냥 넘어간다. 무엇이 좋아진다는 약속 없이, 어금니의 상태 하나만 알아두는 정도로 충분하다.

강가의 이삭은 꺾인 채로 부러지지 않았고, 회색 하늘은 그 위에 낮게 걸린 채 그대로다.

배진경 기자 · Breath.So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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