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력업체 마흔 곳의 전력 사용량을 모으라는 지시를 받은 담당자가 있다고 하자. 그가 처음 부딪히는 문제는 규제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어느 달치 고지서를 어떤 단위로 받을지, 빠진 곳은 무엇으로 채울지다. 공시 의무화를 둘러싼 논쟁이 몇 년째 제자리를 맴도는 동안, 실무의 벽은 이런 모양으로 서 있었다.
제도의 윤곽은 굵은 선까지 그어졌다. 공시 로드맵 최종안이 정리됐고,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며, 허위공시에 형사처벌을 두는 조항까지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도입 시점은 2028년으로 제시돼 있다.
그렇다면 남은 기간을 무엇에 쓸 것인가. 검증 인프라와 데이터 체계를 세우는 데 써야 한다.
부담을 호소하는 쪽의 논리는 가볍지 않다. 인력이 열 명 남짓인 중견 제조업체에 배출량 산정 담당자를 따로 두라는 요구는 현실과 멀다. 외부 검증 비용은 매년 나가고, 협력업체 자료를 받아내는 일에는 강제력이 없다.
형사처벌 조항이 붙으면 틀린 값을 적을 위험을 감수하느니 보수적으로 부풀려 적는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걱정을 가짜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 유예는 그 부담을 없애지 않는다. 뒤로 미룰 뿐이다. 준비 기간을 2년 늘려도 검증기관이 저절로 늘지 않고, 협력업체의 기록 양식이 저절로 통일되지 않는다. 시간을 벌어놓고 아무것도 세우지 않으면 새 기한이 왔을 때 같은 호소가 되풀이된다.
거꾸로, 지금부터 쓰는 시간은 복리로 쌓인다. 첫해에 만든 산정 양식은 이듬해에도 쓰인다. 협력업체와 한 번 맞춰둔 자료 요청 주기는 다음 해에 그대로 굴러간다. 검증인을 길러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지 않다는 사정을 생각하면, 사람을 키우는 일부터가 기한에 쫓기는 항목이다.
의무화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물음은 제도의 윤곽이 잡히기 전에 유효했다. 중소 협력업체의 자료 제출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도울 것인가. 검증기관의 자격과 수를 언제까지 어느 수준으로 맞출 것인가. 형사처벌 조항의 적용 범위를 고의와 착오 사이에서 어디에 그을 것인가.
남은 기간은 열여덟 분기가 채 되지 않는다.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는지가 2028년 첫 보고서의 양식이 빈칸으로 남을지 근거 있는 값으로 채워질지를 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