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옥수수 알갱이의 얼룩이 말을 걸어왔다

편집부·입력 2026. 08. 20. 오전 11:10:00
바버라 매클린톡, 옥수수와 움직이는 유전자를 말하다
바버라 매클린톡(1902~1992)
바버라 매클린톡(1902~1992) / 일러스트 ⓒ 브레스저널

옥수수 이삭 하나에 알갱이 색이 고르지 않게 박혀 있다. 한 알은 짙고 옆의 한 알은 희끗하며, 어떤 알에는 작은 반점이 흩뿌려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저 얼룩이다. 한 사람에게는 세대를 건너뛰며 위치를 옮기는 유전자의 흔적이었다.

바버라 매클린톡은 1902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나 1992년 세상을 떠난 미국의 세포유전학자다. 1919년 코넬대 농업대학에 들어가 1923년 학사, 1927년 박사 학위를 받았고, 옥수수 염색체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염색 기술을 개발했다. 1931년 해리엇 크레이튼과 함께 감수분열 중 염색체 교차와 형질 재조합이 연결된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1944년 미국국립과학원 회원으로 뽑혔고, 1983년 유전적 전이의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홀로 받았다.

Q1. 1921년 코넬에서 C. B. 허치슨의 유전학 강의를 들으셨고, 이듬해 그가 전화를 걸어 대학원 과정에 들어오라고 권했습니다. 그 통화가 진로를 갈랐다고 보십니까?

전화 한 통이 제 미래를 결정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유전학에 머물렀습니다. 허치슨 선생은 강의실에서 제가 보인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통화 이전에 더 큰 문턱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에 가면 결혼을 못 하게 된다며 반대했고, 그 시절 부모들의 흔한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등록 직전에 허락해 주지 않았다면 1919년의 입학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Q2. 1929년 삼배체 옥수수 염색체 논문 이후 코넬의 세포유전학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옥수수 열 개 염색체의 모양을 처음 보여주신 것도 이 무렵인데, 무엇을 바꾸었기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는지요?

보는 곳을 바꿨습니다. 다들 뿌리 끝 세포를 들여다보던 때에 저는 소포자의 세포를 관찰했습니다. 카민 염색을 쓰니 열 개 염색체가 각기 다른 생김새로 드러났고, 그때부터 함께 유전되는 형질 묶음을 특정 염색체와 짝지을 수 있었습니다.

1930년에는 감수분열 중 상동 염색체가 십자 모양으로 얽히는 장면을 기술했습니다. 이듬해 크레이튼과 함께, 현미경에서 본 그 교차가 실제로 새로운 형질을 만든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그전까지 재조합은 가정이었고, 우리는 그 가정을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 바꿨습니다.

미주리에서 루이스 스태들러가 엑스선 돌연변이 유발법을 가르쳐 준 것도 컸습니다. 방사선을 쬔 옥수수에서 고리 염색체를 보았고, 염색체 끝에 안정성을 지키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텔로미어를 짐작하게 된 출발점입니다.

Q3.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전이인자를 발견하셨지만 회의론에 부딪혔고, 1953년에는 데이터 출판을 멈추셨습니다. 당시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1947년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실에서 세포유전학 연구에 몰두한 매클린톡
1947년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실에서 세포유전학 연구에 몰두한 매클린톡 / 사진 Smithsonian Institution · 퍼블릭 도메인

당혹, 그리고 얼마간의 적대였습니다. 유전체는 세대를 넘어 그대로 전달되는 고정된 명령 목록이라는 생각이 굳어 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저는 염색체 위에서 위치를 바꾸는 요소가 있고, 그것이 유전자를 켜고 끈다고 말했습니다.

제 발표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알갱이 색 무늬를 여러 세대에 걸쳐 추적한 교배 결과와 현미경 관찰을 한 번에 풀어놓았으니, 따라오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1953년을 끝으로 저는 데이터를 더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포기한 것은 없습니다. 연구는 계속했고, 발표를 멈췄을 뿐입니다.

Q4. 출판을 멈춘 뒤 남아메리카 옥수수 품종의 세포유전학과 민족식물학으로 옮겨 가셨습니다. 그 전환이 회복이었는지, 후퇴였는지 궁금합니다.

돌이켜 보면 숨 쉴 곳이었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재래 품종들은 사람이 오래 길러 온 역사와 염색체의 역사를 함께 품고 있었고, 저는 그 둘을 같이 읽었습니다. 논쟁에서 떨어져 손으로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혼자 있을 줄 아는 아이였습니다. 세 살 무렵 브루클린의 이모 댁에서 지냈고, 학교에서도 무리를 짓지 않았습니다. 코넬에서 여학생 클럽의 초대를 받았지만 그 단체가 유대인을 배제하는 규약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약을 깼습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저는 불렀습니다. 그 능력이 밭에서 오래 버티게 해 주었습니다.

Q5.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다른 연구자들이 유전적 변화와 단백질 발현 메커니즘을 확인하면서 선생님의 연구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1983년 노벨상으로 이어졌습니다. 30년 넘게 걸린 그 시간을 과학의 실패로 보십니까?

과학은 그렇게 움직입니다. 제가 옥수수에서 본 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른 재료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같은 현상을 여러 갈래로 확인해야 비로소 공용어가 됩니다.

그렇더라도 대가는 사람이 치릅니다. 저는 1953년부터 발표를 접었고, 그 기간에 나오지 못한 결과가 있습니다. 낯선 결과를 들고 온 사람에게 학계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몸으로 배웠습니다.

1983년 12월 8일 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 강연을 하는 매클린톡
1983년 12월 8일 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 강연을 하는 매클린톡 / 사진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재료를 바꿔도 같은 눈은 통합니다. 옥수수에서 익힌 관찰법은 다른 생물로 옮겨 가서도 그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Q6. 오늘의 과학은 유전자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편집합니다. 논문 수와 인용으로 연구를 평가하는 관행도 그때보다 강해졌습니다. 지금의 연구자들에게 옥수수 밭에서 배운 것 중 무엇이 여전히 쓸모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유전자를 바꾸려는 사람일수록, 유전체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전이인자는 어떤 세포에서는 이동하고 어떤 세포에서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한 알갱이 안에서도 결과가 갈렸고, 그 무작위성이 바로 얼룩무늬였습니다.

평가 문제는 제 시절에도 형태가 달랐을 뿐 있었습니다. 저를 지켜준 것은 해마다 밭에 심은 옥수수였습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몇 세대를 기다려야 하는 재료를 다루는 일이 지금도 필요합니다. 짧은 주기에 맞춰 잘라낸 연구만 살아남으면, 30년 뒤에 이해될 발견은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Q7. 100년 뒤의 젊은 연구자가 선생님의 옥수수 표본을 마주한다면, 무엇을 보길 바라십니까?

알갱이 하나를 오래 보길 바랍니다. 저는 이상한 무늬가 보이면 예외라며 넘기지 않고 이유를 캐물었고, 그 습관이 전부였습니다.

밭에서 이삭을 따 들고 햇빛에 비춰 보던 오후가 있습니다. 그 안에 답이 적혀 있었고, 저는 읽는 법을 배우는 데 평생을 썼습니다.

매클린톡이 물려준 방법은 특별한 장비를 요구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오차로 처리하지 않고 기록해 두는 습관, 실험실에서든 텃밭에서든 누구나 오늘 시작할 수 있다. 지금 손에 든 데이터에서 가장 설명하기 곤란한 한 줄에 표시를 해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바버라 매클린톡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녀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편집부 · Breath.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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