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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소설로 말했다

편집부·입력 2026. 08. 05. 오전 10:10:00
베르타 폰 주트너, 소설가에서 평화운동 조직가로
베르타 폰 주트너(1843~1914)
베르타 폰 주트너(1843~1914) / 일러스트 ⓒ 브레스저널

1876년 파리, 한 저택의 서재에 서른셋의 여성이 비서로 들어섰다. 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해 얻은 일이었고, 고용주는 알프레드 노벨이었다. 그 일은 일주일 만에 끝났다. 그는 빈으로 돌아가 아르투어 폰 주트너와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베르타 폰 주트너는 1843년 프라하 킨스키 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육군 장성이었으나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작위가 얕은 집안 출신이었다. 궁정 출입 자격도 물려받을 영지도 없이 자란 그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영어를 익혔고 피아노와 노래를 배웠다.

1873년 주트너 남작가의 가정교사가 되면서 인생이 갈렸다. 1889년 소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Die Waffen nieder!)》를 냈고, 1905년 여성으로는 처음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Q1. 1876년 파리에서 노벨의 비서로 일한 기간은 일주일에 그쳤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 이후 삶에 그렇게 오래 이어질 줄 아셨는지요?

몰랐습니다. 저는 생계 때문에 그 광고에 답했습니다. 가정교사 급여로는 결혼할 수 없었고, 파리로 간 것은 도피에 가까웠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폭약을 만드는 사람과 전쟁을 미워하게 될 사람이 마주 앉아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두고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빈으로 돌아와 아르투어와 결혼했고, 노벨과는 그가 세상을 뜬 1896년까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일주일짜리 고용이 이십 년의 서신이 됐습니다.

Q2. 1889년 《무기를 내려놓으시오!》는 논설 대신 소설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왜 이야기를 택하셨습니까?

논설은 동의한 사람만 읽습니다. 저는 전쟁을 겪은 적 없는 응접실의 부인들이 읽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한 여자가 전쟁으로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게 썼습니다.

같은 해에 《기계 시대의 도래(Das Maschinenalter entsteht)》도 냈습니다. 저는 버클과 스펜서, 다윈을 읽으며 인류가 어떤 습관을 벗어던지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배웠습니다. 전쟁도 그런 습관의 하나라고 봤습니다. 소설은 그 생각을 사람의 얼굴로 옮긴 것입니다.

책이 팔리자 조직이 필요해졌습니다. 1891년 오스트리아에 평화 단체를 세웠고, 1892년부터 1899년까지 제 책 제목을 그대로 딴 잡지를 냈습니다. 소설 한 권으로는 무엇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헤이그 평화궁에 세워진 베르타 폰 주트너 조각상, 2013년 개막 100주년에 제막됐다
헤이그 평화궁에 세워진 베르타 폰 주트너 조각상, 2013년 개막 100주년에 제막됐다 / 사진 Hope Elizabeth May · CC BY-SA 4.0

Q3. 급진적 평화주의자라는 말이 칭찬으로만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비난을 들으셨는지요?

감상적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여자가 소설을 써서 국방을 논한다는 조롱도 있었습니다. 육군 장성의 딸이 군대를 욕한다는 힐난도 받았습니다.

제 한계도 압니다. 1900년에 헤이그 회의를 다룬 책을, 1909년에는 《군비와 과잉 군비(Rüstung und Überrüstung)》를 냈지만 유럽의 군비는 줄지 않았습니다. 1912년에는 하늘에서 벌어질 일을 걱정하는 글을 썼습니다. 제가 쓴 것들이 사태를 늦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Q4. 결혼 초기에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돈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는 1856년 비스바덴에서 도박으로 큰돈을 잃었고, 저는 그 여파 속에서 자랐습니다. 결혼 뒤에는 우리 힘으로 벌어야 했습니다.

궁핍이 저를 망가뜨리지 않은 이유는 그 시절에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남편도 소설을 썼고, 우리는 원고로 생활을 꾸렸습니다. 가진 것이 줄어드는 동안 쓰는 사람으로 변해 갔습니다.

어린 시절 저를 가르친 것은 사촌 엘비라였습니다. 그가 문학과 철학을 손에 쥐여 줬고, 저는 그 독서를 밑천 삼아 어른이 됐습니다. 도박으로 무너진 집안에서 남은 재산은 그 책들이었습니다.

Q5. 1905년 노벨 평화상은 여성에게 처음 돌아간 평화상이었습니다. 상이 운동에 무엇을 보태던가요?

문이 열렸습니다. 그전까지 제 말은 소설가의 의견이었고, 그 뒤로는 회의장에 초대받는 사람의 말이 됐습니다. 같은 문장을 말해도 듣는 귀의 수가 달라졌습니다.

1913년 헤이그 제2차 평화회의 당시의 베르타 폰 주트너(가운데)
1913년 헤이그 제2차 평화회의 당시의 베르타 폰 주트너(가운데) / 사진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대신 상은 사람을 대표로 만듭니다. 대표가 된 사람은 운동의 얼굴이 되고, 얼굴이 넘어지면 운동이 흔들립니다. 저는 1907년에 평화운동이 어떻게 커져 왔는지를 정리한 책을 냈습니다. 그 운동을 여러 사람이 함께 해온 일로 적어두고 싶었습니다.

Q6. 2026년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무기 산업은 성장 산업으로 불립니다. 백 년 전 유럽에서 보신 것과 지금이 닮았습니까?

제가 겪은 것은 군비가 늘수록 안전해진다고 믿는 사회였습니다. 이웃이 늘리니 우리도 늘리고, 우리가 늘리니 이웃이 또 늘렸습니다. 그 논리는 스스로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1912년에 저는 항공이 전쟁에 쓰일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썼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을 진보의 무대로만 봤습니다. 새 기술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지 않게 하려면, 그 기술이 완성되기 전에 규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쟁이 명예롭다고 배운 보통 사람들이 전쟁을 지탱합니다. 그 교육을 바꾸는 일이 제 평생의 일이었습니다.

Q7. 오스트리아 2유로 동전에 선생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 얼굴을 보게 될 사람들에게 무엇을 건네시겠는지요?

동전은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닙니다. 저는 그 점이 마음에 듭니다. 한때는 1,000실링 지폐에도 제 얼굴이 있었지만, 지폐는 지갑에 접혀 있고 동전은 굴러다닙니다.

1889년 원고를 넘길 때 저는 그 책이 팔릴지 몰랐습니다. 팔리지 않아도 쓸 생각이었습니다. 누군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그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고,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문장이 한 번이라도 떠오른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베르타 폰 주트너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편집부 · Breath.So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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