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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 신은 육종학자, 밥상을 바꾸다

편집부·입력 2026. 07. 09. 오후 3:30:00
결구배추와 감자를 다시 짠 우장춘이 종자 자립을 말하다
우장춘(1898~1959)
우장춘(1898~1959) / 일러스트 ⓒ 브레스저널

연구소 마당을 걷는 그의 발에는 늘 고무신이 걸려 있었다. 학생들이 수학여행 길에 이곳을 찾아왔고, 사람들은 그를 고무신 박사라고 불렀다. 물이 모자라던 시험장에 우물을 파도록 한 것도 그였다. 그 우물의 이름은 자유천이다.

우장춘(禹長春)은 1898년 4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1959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난 농생물과학자이자 원예육종학자다. 아버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였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고 보육원과 사찰을 거쳐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1916년 4월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에 들어갔고, 1936년 5월 4일 '종의 합성' 논문으로 모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고원으로 일을 시작해 기수가 되었고, 1950년 3월 8일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운영을 맡았다. 1958년 농림부 농사원 원예시험장 수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만성 위 십이지장 궤양으로 향년 62세에 눈을 감았다. 그가 제창한 종의 합성 이론은 현대 유전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부산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고, 2003년 4월 21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Q1. 1950년 3월 8일에 배를 타셨습니다. 일본에는 부인과 자녀가 있었고, 이곳에는 아버지 우범선의 이름이 앞서 와 있었습니다. 그 배를 타기로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연구소를 맡아달라는 청이 왔습니다. 1949년에 세워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였지요. 저는 밭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밭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저보다 일찍 도착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제 평생의 짐이었습니다. 짐을 지고도 걸을 수는 있습니다. 저를 믿지 못한 이들이 출국을 막았을 때도 저는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Q2.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이 땅 환경에 맞는 결구배추를 만드셨고, 바이러스에 약하던 강원도 감자도 개량하셨습니다. 두 작업을 하나로 꿰는 생각이 있었습니까?

종의 합성입니다. 진화가 이로운 돌연변이의 축적으로만 일어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종이 만나 새 종이 만들어지고, 저는 배추와 양배추를 붙여 그것을 밭에서 확인했습니다. 벼를 한 해 두 번 거두는 이기작을 연구한 것도 같은 생각에서였습니다.

배추는 잎이 속으로 말려 단단히 차야 김치가 됩니다. 감자는 병을 견뎌야 씨감자로 다시 심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기후와 흙과 밥상에 맞춰 종을 새로 짜는 일이었습니다. 페튜니아 겹꽃도, 제주에 권한 감귤과 유채도, 길가에 심으라 한 코스모스도 같은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Q3. 씨 없는 수박은 1947년 기하라 히토시가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오래도록 선생을 최초라고 여겼습니다. 그 오해를 곁에 두고 사신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저는 그것을 제 발명이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협회에서 개발한 여러 종자를 농민에게 알리려고 만든 홍보물이었습니다. 밭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육종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면 눈에 잡히는 물건이 하나 있어야 했지요.

그 수박이 제 이름을 실제보다 크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결구배추와 감자가 훨씬 큰일인데 사람들은 수박을 기억했습니다. 홍보물 하나가 학문의 얼굴이 되면 밭에서 오래 걸린 일들은 가려집니다.

Q4. 보육원과 도쿄 회운사에서 지내던 시절, 끼니는 감자였고 조선인 아버지를 둔 아이라는 이유로 또래에게 밀려나셨습니다. 그 시절은 언제쯤 물러갔습니까?

물러갔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절에서 아라이 선사와 동자승들 곁에 있던 시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삼 년 만에 저를 데리러 왔고, 조선에서 온 뿌리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바다를 건널 수 없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가 험했고, 저를 미덥지 않게 본 이들이 뱃길을 막았습니다. 원예시험장 강당에서 위령제를 지냈고, 전국에서 온 조의금으로는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없으면 모종이 죽습니다.

Q5.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 수 있도록 겹꽃 개량종을 만드셨습니다. 꽃 한 종을 붙들고 여러 해를 보내는 일이 과학에서 어떤 값을 갖습니까?

꽃 하나를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데도 여러 해가 걸립니다. 왜 뜻대로 되지 않는지 알아내는 데 그 시간의 대부분이 들어갑니다. 시험장에서 저를 아껴준 데라오 박사가 그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답을 얻고 나면 배추에도 감자에도 같은 손이 쓰입니다.

육종은 한 해에 한 세대씩 갑니다.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고, 그 씨로 이듬해 봄에 다시 심습니다. 사람의 한평생에 서른 번 남짓 돌아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학문의 전부입니다.

Q6. 지금은 기후가 흔들리며 재배지가 북으로 밀리고, 종자를 바깥에서 사 오는 일이 흔합니다. 결구배추와 감자를 이 땅에 맞게 다시 짜셨던 경험에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씨앗은 그 땅에서 여러 해를 살아본 것이라야 합니다. 남의 땅에서 잘 자란 씨앗이 이곳에서도 잘 자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땅의 병과 추위를 겪어본 씨앗이라야 이듬해에도 농민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저는 강원도 감자를 고칠 때 강원도 흙에서 시작했습니다.

기후가 달라지면 종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 일을 할 사람이 나라 안에 있어야 하고, 그들이 여러 해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급하게 성과를 재촉하면 육종은 되지 않습니다. 온실 하나와 밭 한 뙈기, 열 해를 견딜 마음이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Q7.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부문상을, 1959년에는 안익태 다음으로 문화포장을 받으셨습니다. 다음 사람들에게 무엇을 두고 가신다고 보십니까?

상은 종자와 그것을 심은 농민의 것입니다. 제 묘는 수원 여기산에 있고, 그 아래는 여전히 밭입니다.

고무신을 신고 온실 문을 여는 사람이 계속 있으면 됩니다. 그 사람이 봄에 한 줄을 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우장춘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편집부 · Breath.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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