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 위로 펜촉이 지나간다. 창밖으로 자바의 오후가 흘러가는데, 저택 안 소녀는 문을 나설 수 없다. 19세기 말 자바에서 혼인 전 여자아이는 집 안에 머물러야 했고, 배움도 거기서 멈추는 것이 관례였다.
라덴 아증 카르티니는 1879년 4월 21일 자바 마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소스로닝랏은 네덜란드 식민 행정 아래 중부 자바 북부를 관할했고, 1880년 제파라의 리전트가 됐다. 여섯 살에 네덜란드어 학교에 들어가 인도네시아 아이로는 드물게 유럽식 교육을 받았다. 혼인해 렘방으로 옮긴 그녀는 1904년 9월 17일 첫아이를 낳은 지 나흘 만에 스물다섯으로 숨졌고, 편지들은 1911년 《어둠에서 빛으로》로 묶여 나왔다.
Q1. 학교를 마친 후 혼인 전까지 저택 안에 머무셔야 했고, 1896년에야 아버지의 허락으로 마을에 나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몇 해를 공백으로 부릅니다. 선생께서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방에서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손에 들어오는 책은 모두 읽었고, 자바 사람과 네덜란드 사람 양쪽에 편지를 썼습니다. 갇힌 사람이 세상과 닿는 통로는 종이뿐이었습니다.
혼인할 때까지 여자아이를 집 안에 두는 관습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몸을 묶어두면 생각도 묶인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습니다. 나갈 수 없으니 저는 더 멀리 읽었고, 읽은 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더 정확하게 썼습니다.
1896년 문밖으로 나갔을 때, 저는 세상을 안다고 착각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손등과 그들이 하루를 견디는 방식을 보고서야 제 독서가 얼마나 얇았는지 알았습니다.
Q2. 네덜란드 관리와 지식인들, 그중 아벤다논과도 오래 편지를 주고받으셨습니다. 학교를 세우겠다는 생각은 어느 지점에서 굳어졌습니까?
편지를 쓰면서 굳어졌습니다. 말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물러설 수 있지만, 종이에 적은 문장에는 물러설 데가 없습니다. 저는 네덜란드어로 생각을 적으면서 그것이 제 것인지 빌린 것인지 계속 확인해야 했습니다.
제가 학교를 말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바의 여자아이들은 높은 배움에서 밀려났고, 어린 나이에 정해진 혼인으로 보내졌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려면 배워야 하고, 배우려면 교실이 있어야 합니다.
동생들이 함께 학교를 세우고 운영했습니다. 저 혼자 시작한 일도, 저 혼자 끝낼 일도 못 됩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도 동생들은 여자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Q3. 혼인하지 않은 여성이 마을을 다니고 네덜란드어로 글을 쓰는 일은 당시 자바에서 드물었습니다. 주위의 시선을 어떻게 받으셨는지요?

아팠습니다. 저는 반항아로 불리는 것을 즐긴 적이 없습니다. 제 집안은 지체 높은 프리야이였고, 저는 그 위계가 사람에게 어떤 표정을 짓게 하는지 어릴 때부터 보았습니다.
네덜란드어 학교에서도 저는 함부로 대해지는 갈색 아이였습니다. 교사도 같은 교실의 아이들도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나 제 공부가 인정을 받았지만, 처음의 그 눈길은 잊히지 않습니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여자들이 더 어린 여자아이들을 나무라는 광경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놓인 사람을 그 곁의 사람이 눌렀습니다. 아내를 몇 명 두었는지로 남자의 지위를 재는 사회에서, 여자들은 서로를 단속하며 살았습니다.
Q4. 정혼과 일부다처를 반대해 오셨습니다. 그런 선생께서 혼인해 렘방으로 가신 일을 두고 사람들은 굴복이라 부릅니다. 스스로는 그 선택을 무엇이라 부르십니까?
굴복이라 부르셔도 반박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반대한 제도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지 않습니다.
지키려 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혼인한 여자가 되어서도 여자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놓지 않겠다는 것. 완전한 자유와 아무것도 못 하는 처지 사이에서 저는 계속할 수 있는 쪽을 골랐습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저는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렘방에서 오래 살지 못했으니까요. 그 일은 동생들과, 제 글을 읽고 학교를 세운 사람들이 대신했습니다.
Q5. 이 기획은 문화유산을 다룹니다. 사사로운 편지였던 글이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유산으로 읽힙니다. 그 변화가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불편을 없애는 편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 편지는 유산이기 전에 한 사람이 밤에 쓴 사사로운 글이었습니다. 부끄러운 문장도, 흔들린 문장도 거기 있습니다.
유산을 지킨다는 말이 이름만 지킨다는 뜻이라면 저는 반쯤만 동의합니다. 자바의 것을 지키려면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하루가 함께 지켜져야 합니다. 형태는 보존되고 손은 사라지는 보존을 저는 보았습니다.

사사로움을 지운 채 기념만 하면, 제 이름 하나가 벽에 걸릴 뿐입니다. 저는 벽에 걸리려고 쓰지 않았습니다.
Q6. 1964년 선생은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으로 선포됐고, 생일인 4월 21일은 지금도 카르티니의 날로 기념됩니다. 기념일이 한 사람의 생애를 대신하는 일에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기념일은 하루입니다. 제가 살았던 문제는 하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배움에서 밀려나는 여자아이가 지금도 있다면, 제 생일을 지키는 일보다 그 아이의 교실을 지키는 일이 우선합니다.
영웅이라는 말도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제 방에서 나가려고 애쓴 사람이었고, 그 일을 혼자 해내지 못했습니다. 동생들과 벗들, 제 글을 읽고 교실을 연 사람들의 이름이 제 이름과 함께 불려야 합니다.
이름이 커질수록 그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살아서도 그것은 알았습니다.
Q7. 편지가 1911년 책으로 묶여 나왔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학교를 세웠습니다. 다음 사람들에게 무엇을 건네고 싶으신지요?
편지 한 통이면 됩니다. 받는 사람의 이름을 적고, 오늘 본 것을 정확하게 쓰면 됩니다. 저는 그렇게 해서 방을 나갔습니다.
낮은 탁자와 마르지 않은 종이, 제게는 그 둘로 충분했습니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들이 했습니다.
카르티니가 죽고 일곱 해가 지나 편지는 책이 됐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바 곳곳에 카르티니 학교를 열었다. 4월 21일의 기념 행렬보다, 오늘 본 것을 정확히 적어 누군가에게 보내는 종이 한 장이 그 생애에 가깝다. 갇힌 방에서 쓰인 문장이 교실이 됐다는 사실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카르티니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녀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