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이웃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편집부·입력 2026. 05. 05. 오전 9:50:00
헐 하우스를 세운 제인 애덤스가 말하는 복지와 평화, 여성 참정권
제인 애덤스(1860~1935)
제인 애덤스(1860~1935) / 일러스트 ⓒ 브레스저널

네 살에 척추 결핵을 앓은 아이가 있었다. 등이 굽어 또래처럼 뛰지 못했고, 일요일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아버지 옆을 걷는 것조차 민망해했다. 그 아이는 자라 시카고의 낡은 저택 문을 열어놓고 한 주에 이천 명을 맞았다. 제인 애덤스(Jane Addams)의 이야기다.

1860년 일리노이주 시더빌에서 여덟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1881년 락포드 대학을 졸업했고, 1889년 엘렌 게이츠 스타와 함께 시카고에 헐 하우스(Hull House)를 세웠다. 1915년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 이사장에 선출됐고, 1920년에는 미국시민자유연맹 공동 창립에 참여했다. 1931년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은 첫 미국 여성이 됐고, 1935년 세상을 떠날 때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 공인이었다.

Q1. 어린 시절에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곁에서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고 하셨는데, 그 길을 접은 것은 언제였습니까?

건강이 무너지면서였습니다. 등을 곧게 펴는 치료를 받고 공부 대신 요양을 권유받던 무렵, 가난한 사람 곁에서 살기 위해 반드시 의사 면허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몇 해가 제 인생에서 가장 쓸모없던 시기였습니다. 잘사는 집 딸에게 기대되는 생활을 그대로 살았습니다. 락포드에서 사귄 엘렌 게이츠 스타에게 긴 편지를 써 보내며 절망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 시기의 끝에 유럽을 다니며 도시 빈민가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도를 보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무엇을 할지 정해져 있었습니다.

Q2. 헐 하우스에는 야간학교와 유치원, 미술관, 체육관, 수영장, 제책소, 연극단까지 있었습니다. 구제 기관이라면 식당과 침상만 있어도 되는데 왜 수영장과 연극단이 필요했는지요?

배고픈 사람에게 빵만 주면 된다는 생각을 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헐 하우스 둘레에 살던 이민 노동자 가정은 극장에 갈 돈도, 미술관에 갈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부자의 취미로 미뤄두면 가난은 재산의 문제를 넘어 사람됨의 문제로 굳어집니다.

야간학교는 낮에 공장에서 일한 성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치원과 어린이 클럽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동안 아이를 맡는 곳이었고요. 도서관, 음악학교, 카페, 자선 식당, 작업장이 한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동네 안에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방문하고 돌아가는 사람은 이웃의 사정을 절반만 봅니다. 같은 골목에서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냄새를 맡으면, 쓰레기 수거와 상수도가 왜 정치의 문제인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1915년 국제여성회의 현장 기록 사진
1915년 국제여성회의 현장 기록 사진 / 사진 LSE Library · 퍼블릭 도메인

Q3.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반전 평화운동을 이끄셨습니다. 존경받던 이름이 순식간에 반대편에 놓였습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전쟁 전까지 저는 어디서든 환영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같은 말을 하는데도 청중이 등을 돌렸습니다. 애국심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오래 들었습니다.

제 잘못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겪는 두려움의 크기를 낮춰 봤습니다. 아들을 보낸 어머니에게 전쟁을 멈추자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모욕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1915년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 이사장을 맡은 것은 그 비난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1931년 노벨 평화상 소식이 왔을 때 제가 느낀 것은 기쁨보다 긴 세월이 흘렀다는 감각이었습니다.

Q4. 어린 시절 병으로 다리를 절었고 오래 건강에 시달리셨습니다. 그 약함이 헐 하우스의 일에 남긴 흔적이 있었는지요?

저는 제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남들처럼 달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어떤 일인지 저는 몸으로 압니다. 그래서 헐 하우스에 오는 아이 중 다른 아이들 놀이에 끼지 못하는 아이가 늘 눈에 들어왔습니다.

스무 살 무렵의 몇 해는 실패로 남았습니다. 의학의 길을 잇지 못했고, 그 슬픔을 오래 안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쓸모없다는 감각이 사람을 어떻게 갉아먹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회복은 결심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할 일이 생기고 그 일을 함께할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왔습니다. 스타가 없었다면 저 혼자서는 1889년의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Q5. 도시 행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다룬 글에서 위생과 학교 같은 부서가 본래 가정 안의 일에서 나왔다고 쓰셨습니다. 이 논리가 여성 선거권 주장과 어떻게 연결됩니까?

어머니가 집에서 하던 일을 도시가 대신 맡게 된 것이 근대 행정입니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는 일, 오물을 치우고 물을 관리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그 일이 시청으로 옮겨 갔는데 정작 그 일을 해온 사람에게 투표권이 없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1921년 빈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 집행위원회, 제인 애덤스 참석
1921년 빈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 집행위원회, 제인 애덤스 참석 / 사진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저는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기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동등한 권리를 말한 것입니다.

선거권은 자선의 반대말입니다. 누군가에게 베풀어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그 결정을 함께 내리는 사람이 되는 일이니까요.

Q6. 2026년에도 도시 빈곤과 이주민 문제는 그대로입니다. 요즘의 복지는 신청서와 심사 창구를 거쳐 전달됩니다. 1889년의 정착관 방식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십니까?

제도가 넓어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헐 하우스가 한 주에 이천 명을 감당하려 애쓰던 것을 생각하면, 나라가 그 일을 맡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저는 정착관이 영원한 답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신청서를 받는 사람과 내는 사람이 같은 동네에 살지 않으면, 신청서에 적히지 않는 사정은 아무도 모르게 됩니다. 서류를 쓸 줄 모르는 사람, 말이 서툰 사람, 창구까지 갈 시간이 없는 사람은 통계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권하고 싶은 것은 습관 하나입니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 그 정책을 받는 사람과 한 주에 한 번은 같은 탁자에 앉는 것입니다. 헐 하우스를 헐 하우스로 만든 진짜 설비는 수영장이 아니었습니다. 그 탁자였습니다.

Q7. 193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세기 가까이 시카고를 지키셨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은 한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겨울 저녁, 야간학교 교실의 등이 켜지는 시각입니다. 낮에 일한 손이 연필을 잡느라 서툴게 움직입니다.

그 손이 몇 해 뒤 투표용지를 접었습니다. 바뀌고 있던 것은 그 손의 자세였습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제인 애덤스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녀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편집부 · Breath.Social

관련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