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아이가 밤 열두 시에 방문을 닫는다. 그 방문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통계에도 실시간으로 잡히지 않는다. 이 아이가 병원에 도착하는 날, 우리는 비로소 그 아이를 한 건의 사례로 기록하게 된다. 그런데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누가 지켰나.
정부는 정신건강을 국가가 직접 책임지겠다고 밝히며 병상을 늘리고 진료비 지원을 넓히는 전주기 안전망을 내놨다. 같은 주에 청소년 자해의 첫째 원인이 마음 손상이라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두 소식은 나란히 놓였지만, 겨누는 시점이 다르다. 하나는 무너진 뒤를 받치고, 다른 하나는 무너지기 전을 가리킨다.
이 글의 주장은 하나다. 치료 인프라를 넓히는 일과 별개로, 아이가 스스로를 다치게 하기 전 몇 주·몇 달의 일상을 붙드는 힘이 함께 커지지 않으면 안전망은 뒷문만 넓힌 집이 된다.
반론은 강하다. 병상이 없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진료비가 무서워 진료를 미루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 응급 상황에서 받아줄 곳이 있느냐는 생사를 가르는 조건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예방을 말하는 것은 사치처럼 들린다. 인프라 확충은 늦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마음 손상이 첫째 원인으로 꼽혔다는 점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마음 손상은 응급실에서 봉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에서 생기고, 관계에서만 회복된다. 병상은 생명을 살리지만, 살아난 아이가 돌아갈 교실과 집이 그대로라면 같은 길이 다시 열린다.
당사자를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만 그리는 시선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 자해를 택한 아이들 다수는 어떻게든 견뎌보려 애쓴 시간을 통과해 온 사람들이다. 관리 대상이 되는 경험보다, 무너지기 전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곁에 남아 있는 경험이 이들에게 필요하다. 제도가 늘어날수록 그 차이가 성패를 가른다.
그래서 새 정책을 볼 때 확인할 것은 병상 수만이 아니다. 누가, 언제부터, 어떤 절차로 그 문을 열 수 있는지가 함께 적혀 있어야 한다. 위기 이전 단계에서 아이와 가족이 부담 없이 닿을 수 있는 통로가 설계에 들어 있는지도 마찬가지다. 그 항목이 비어 있다면 안전망은 절반만 짜인 그물이다.
바뀌고 있는 것도 있다. 마음의 문제를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리던 시선이 국가가 책임질 영역이라는 선언으로 옮겨왔다는 사실 자체가 몇 해 전과는 다른 출발점이다. 이제 그 책임의 범위가 병원 문턱 바깥까지 닿느냐를 지켜볼 차례다. 오늘 밤 문을 닫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응급실보다 앞서 도착하는 안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