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여덟에 회사를 나와 용접을 배우러 간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 특이한 사례로 들리지 않는다. 사무직 공고가 줄었다는 감각은 통계에 잡히기 전에 개인의 이력서에 도착한다. 왜 그가 떠났는지를 물을 일이 아니다. 떠난 뒤 그를 붙잡아 다음 칸으로 옮겨주는 장치가 어디 있었느냐를 물어야 한다.
정부는 AI 시대의 일자리 재설계를 말한다. 재설계라는 말은 설계도가 있다는 뜻이고, 설계도에는 사라지는 칸과 새로 생기는 칸이 함께 그려져야 한다. 그런데 논의는 새로 생기는 칸에만 머문다. 사라지는 칸에 서 있던 사람이 몇 달을 어떻게 버티고 어떤 경로로 옮겨가는지, 그 사이를 메우는 제도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20대 후반 취업자가 눈에 띄게 줄고, 같은 세대가 기술직 쪽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 두 장면은 따로 읽을 수 없다. 제도가 길을 내주기 전에 개인이 각자 출구를 찾아 나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글의 주장은 하나다. AI가 만드는 일자리를 세는 일보다 급한 것은, AI가 걷어낸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을 받아낼 완충 장치를 지금 만드는 일이다.
반론은 분명하고 강하다. 기술이 바꾸는 노동은 늘 그랬고, 시장은 결국 새 균형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자동화가 없앤 일자리보다 만든 일자리가 많았다는 경험도 실제로 있다. 이 반론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번은 성격이 다르다. 예전의 전환은 한 세대에 걸쳐 진행됐고, 사람들은 배우고 옮길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지금의 전환은 문서 작성·정리·1차 응대처럼 신입이 실력을 쌓던 업무부터 걷어낸다. 사다리의 맨 아래 칸부터 사라지면, 위 칸이 몇 개 새로 생겨도 올라갈 방법이 없다.
완충 장치는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전직 훈련 기간의 생계를 버티게 하는 소득 지원, 실무에서 통하는 자격으로 이어지는 짧고 밀도 높은 교육 과정, 경력 단절을 흠으로 보지 않는 채용 관행.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 개인이 감당하던 위험의 상당 부분이 사회로 옮겨온다. 지금은 그 위험을 스물여덟 살이 혼자 진다.
기술직으로 옮겨간 20대를 실패로 읽는 시선도 거둬야 한다. 손으로 만들고 고치는 일은 당분간 자동화가 통째로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이고, 그 선택은 합리적이다. 문제는 그 이동을 받쳐줄 경로가 마련돼 있지 않아 각자 샛길을 뚫었다는 데 있다.
바꿔야 할 대상은 개인의 결심이 아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다음 일을 배우는 6개월 동안 월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는, 전환이 추락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AI는 사람을 밀어내는 힘을 거두고 하루를 덜 소모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그 차이는 알고리즘이 만들지 않는다.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