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미국은 멈췄지만, 판은 멈추지 않았다

플래닛·입력 2026. 02. 21. 오후 3:57:00
위해성 판단 폐기와 IEA 압박, 그 사이 유럽은 90% 감축을 법으로 못 박았다
한 축이 방향을 틀어도 나머지 축은 여전히 앞으로 간다
한 축이 방향을 틀어도 나머지 축은 여전히 앞으로 간다 / ⓒ 브레스저널

2009년부터 17년간 미국의 자동차 배기가스와 발전소 배출을 규제해 온 법적 토대가 지난 12일(현지시각) 사라졌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온실가스가 공중보건과 복지에 위협이 된다는 이른바 '위해성 판단'을 공식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산화탄소와 메탄 등 온실가스 6종을 규제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했던 근거다. 환경단체와 민주당 소속 단체장이 이끄는 주정부들은 곧바로 소송 방침을 밝혔다.

같은 달 유럽에서는 반대 노선의 결정이 나왔다. 유럽의회는 204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90% 줄이는 기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회원국들이 지난해 말 잠정 합의한 내용이 의회 문턱을 넘은 것이다. EU는 올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도 시행하고 있다.

두 소식이 같은 2월에 겹치면서 기후 질서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옮겨가는지가 선명해졌다. 미국은 올해 초 유엔기후변화협약 탈퇴를 선언했고, 집권 2기 들어 파리기후협정에서도 다시 빠져나왔다. 산업혁명 이후 누적 배출량 세계 1위, 연간 배출량으로는 중국에 이어 2위인 나라의 이탈이다. 그 무게를 축소할 이유는 없다.

압박은 국제기구로도 번졌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지난 17일 파리에서 열린 한 국제관계 연구기관 주최 콘퍼런스에서,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기후 문제에 치우치면 탈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IEA에 넷제로 시나리오 발표를 중단하라고 요구해 왔다.

라이트 장관은 지난해 7월에도 추가 개혁 없이는 IEA와 함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낸 바 있다. 실제 탈퇴 절차에 들어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단계다.

미국은 IEA 예산의 14%를 분담한다. 금액으로는 연간 약 6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87억 원가량이다. 기구 하나의 회계에서 적지 않은 몫이지만, 나머지 86%가 어디에 서 있느냐가 실제 흐름을 정한다.

그 답이 지난 19일 파리에서 나왔다. 이틀간 열린 IEA 각료 이사회가 공동성명 없이 끝났다. 회원국 33개국과 가입추진·준회원국 17개국, 초청국 5개국 등 55개국의 장·차관급이 모인 자리였고, 한국에서는 기후부 이호현 2차관이 참석했다. 성명 없이 끝난 것은 2017년 이후 9년 만이다.

2024년 각료 이사회는 지구 온난화를 1.5도로 묶기 위한 청정에너지 전환 가속화를 공동성명에 담았다. 이번에는 의장 요약 형식의 문서가 대신 나왔고, 기후변화는 '다수 장관이 에너지 전환의 중요성과 COP28 합의에 부합하는 넷제로 전환 필요성을 언급했다'는 한 문장으로만 등장했다. 문장은 줄었지만 '다수 장관'이라는 표현은 남았다. 합의문이 사라진 것과 다수가 사라진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정리하면 이렇다. 최대 배출국 한 곳이 규제 근거를 걷어내고 국제 협의 테이블을 흔드는 동안, 27개국 연합은 2040년 목표를 법률로 고정했고, 국경을 넘는 탄소 가격 제도를 이미 돌리기 시작했다. 후퇴는 실재하지만 전면적이지 않다. 판을 지키는 쪽의 숫자가 아직 더 크다.

앞으로 확인할 지점은 두 가지다. 위해성 선택 폐기가 소송을 뚫고 실제 규제 현장에서 효력을 갖는지, 그리고 미국의 IEA 탈퇴 경고가 절차로 이어지는지. 어느 쪽도 이달 안에 판가름 나지 않는다.

그 사이 개인이 쥘 수 있는 것도 있다. CBAM은 유럽으로 물건을 보내는 국내 기업에 제품 하나하나의 배출량을 요구한다. 중소 협력사까지 배출량 산정 부담이 내려오는 제도다. 지금 다니는 회사나 거래처가 이 계산을 시작했는지 한 번 물어보는 것으로도, 이 흐름은 뉴스가 아닌 업무가 된다.

플래닛 기자 · Breath.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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