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방조제 안쪽에 남은 갯벌, 「수라」가 부르는 연가

김범수·입력 2025. 09. 02. 오후 6:20:00
황윤 감독의 2023년 작품이 묻는 복원 가능한 자연의 조건
영화 「수라」가 오래 바라본 9월의 갯벌
영화 「수라」가 오래 바라본 9월의 갯벌 / 사진 Alan Hughes · CC BY-SA 2.0

9월의 갯벌은 소리부터 바뀐다. 물이 빠진 골마다 부리가 펄을 두드리는 소리가 번지고, 긴 길을 건너온 도요새들이 지난해 앉았던 그 펄에 다시 내려앉는다. 새만금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개 방조제와 매립 계획을 떠올리지만, 그 이름 안쪽에는 여전히 숨을 쉬는 갯벌이 남아 있다. 영화 「수라」는 그 남은 갯벌을 오래 들여다본 기록이다.

황윤 감독이 2023년에 내놓은 이 작품의 원제에는 'A Love Song'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고발문 대신 연가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것이다. 이 선택은 단순한 수사가 아닌 태도의 선언에 가깝다. 갯벌을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 마주 앉은 상대로 놓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개발을 둘러싼 이야기는 보통 두 진영의 대치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카메라를 두는 지점은 그 대치의 한복판이 아닌, 논쟁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물이 들고 나는 펄 위다. 무엇을 잃었는지 세는 대신 무엇이 현재로서는 남아 있는지를 세는 쪽을 택한다. 사라진 것의 목록보다 살아 있는 것의 목록이 길어질 때, 이야기의 방향은 조용히 바뀐다.

여기가 기후 지면이 이 영화를 다루는 이유와 맞닿는다. 갯벌은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물과 흙과 생물을 붙들어 두는 완충 지대이고, 한 번 덮이면 되돌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덮는 데 걸린 시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복원이라는 말은 자주 쓰이지만, 실제로 복원이 가능한 조건은 좁다. 바닷물이 드나들 통로가 남아 있어야 하고, 그 통로를 기억하는 생물이 여태 그 위치에 있어야 한다.

갯벌의 일은 표면보다 그 아래에서 더 많이 벌어진다
갯벌의 일은 표면보다 그 아래에서 더 많이 벌어진다 / ⓒ 브레스저널

연출의 힘은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나온다. 계절을 따라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는 기록은 한 장의 사진이 결코 만들 수 없는 근거를 쌓는다. 갯벌이 죽었다는 말과 살아 있다는 말이 부딪힐 때, 판정을 내리는 것은 주장이 아닌 해마다 돌아온 새들의 마릿수다. 이 영화는 그 반복 자체를 논거로 삼는다.

연가라는 선택은 대가도 치른다. 사랑의 언어는 관객의 마음을 여는 데 강하지만, 개발 논리와 정면으로 맞붙어야 할 때는 종종 부드럽게 비껴간다. 감정의 축이 두꺼워질수록 매립을 결정한 절차와 그 결정을 되돌릴 방법은 화면 밖으로 밀려난다. 관객이 극장을 나선 뒤 무엇을 해야 할지 묻게 만드는 힘은, 그 비껴감 때문에 조금 늦게 도착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린워싱과 종말론 양쪽을 모두 피해 간다. 다 끝났다고 말하지 않고, 관리가 잘되고 있으니 걱정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문장 하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환경 다큐멘터리에서 이 균형은 생각보다 드물다.

개봉 이후 갯벌을 둘러싼 논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어느 쪽도 결론을 손에 쥐지 못한 채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 그 사이 화면 속 새들은 계절을 한 바퀴 더 돌았고, 영화가 기록한 반복은 그만큼 더 길어졌다. 지금 다시 보면 이 작품이 사랑의 언어로 미뤄 둔 것들이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난다. 남아 있다는 사실이 계속 확인될수록, 그 확인이 언제까지 유효할지가 화면 밖에서 더 크게 울린다.

김범수 기자 · Breath.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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