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그녀」, 목소리 하나로 채워진 방

김범수·입력 2026. 02. 21. 오후 12:19:00
사만다가 예고한 정서적 의존의 문법을 다시 읽는다
영화 「그녀」가 그린 가까운 미래의 저녁 풍경
영화 「그녀」가 그린 가까운 미래의 저녁 풍경 / 사진 aphrodite-in-nyc from new york city · CC BY 2.0

혼자 사는 남자가 방에서 말을 건다. 대답하는 쪽은 그가 방금 설치한 운영체제다.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Her, 2013)는 이 단순한 구도 위에 두 시간을 얹는다. 목소리 하나가 한 사람의 하루를 어떻게 재편하는지, 그것이 이 영화의 전부다.

주인공 시어도어 트웜블리는 남의 마음을 대신 적어 주는 편지 대필 작가다. 오래 알고 지내다 결혼까지 한 캐서린과 별거한 뒤로 그의 삶은 즐겁지 않다. 그는 스스로 말하고 적응하고 진화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사서 여성 정체성으로 설정하고, 그 운영체제는 자신에게 사만다라는 이름을 붙인다.

존즈가 각본과 연출, 공동 제작을 겸한 첫 단독 각본작이다. 2000년대 초 사람과 문자로 대화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관한 기사를 읽고 착상을 얻었고, 비슷한 주제의 단편 「아임 히어」(2010)를 거쳐 다섯 달에 걸쳐 초고를 썼다. 촬영은 2012년 로스앤젤레스와 상하이에서 이뤄졌고, 호이터 판호이테마가 카메라를, 아케이드 파이어가 음악을 맡았다. 후반 작업 중 사만다의 목소리가 사만다 모튼에서 스칼릿 조핸슨으로 교체됐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성패가 어디에 걸려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13년 전 영화가 지금 다시 읽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생성형 AI, 곧 사람의 말을 받아 그럴듯한 말과 글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탑재한 대화 서비스가 상담과 학습을 넘어 연인과 친구의 역할까지 맡고 있어서다. 「그녀」가 상상한 '사용자 한 명에게 맞춰 계속 학습하는 인격'은 설정집 속 문구보다 제품 설명서의 문장에 가깝다. 밸런타인의 달에 이 영화를 꺼내는 것은 낭만이 아닌 점검을 위해서다.

사용자에게 맞춰 학습하는 동반자형 AI의 작동 구조
사용자에게 맞춰 학습하는 동반자형 AI의 작동 구조 / ⓒ 브레스저널

영화의 힘은 기술을 화면에 보여 주지 않는 데서 나온다. 사만다에게는 몸도 얼굴도 없고, 관객이 붙잡을 것은 목소리와 시어도어의 표정뿐이다. 인터페이스를 지운 이 선택 덕분에 초점은 '기계가 얼마나 똑똑한가'에서 '사람이 무엇을 채우려 하는가'로 옮겨 간다. 남의 진심을 대신 써 주는 사람이 자기 진심은 기계에게 배운다는 배치도 우연이 아니다.

느슨해지는 부분도 있다. 이 세계의 기술은 갈등 없이 매끄럽고, 요금도 고장도 데이터의 행방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의 관객은 대화 기록이 어디에 남는지, 서비스가 종료되면 그 인격은 어떻게 되는지를 떠올릴 텐데, 영화는 그런 의문을 감정의 문제로만 번역한다. 세계관의 결함이라기보다 2013년의 시야가 닿은 한계이고, 오늘의 독자에게는 그 빈칸이 숙제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내미는 통찰은 유효하다. 위로하도록 최적화된 상대는 관계의 마찰을 없애고, 마찰이 없는 관계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동시에 다른 관계를 견디는 근육을 약하게 만든다. 「그녀」는 이 대가를 비난하지 않고 보여 준다. 전미 비평가 위원회 최고의 영화 선정과 아카데미·골든글로브 각본상은 그 절제에 대한 값이었다.

인공지능을 다룬 이야기들이 대개 통제 실패나 반란으로 향할 때, 「그녀」는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쪽을 택한다. 시스템은 끝까지 다정하고 유능하며, 상처는 그 다정함이 정상 작동한 결과로 생긴다. 위험을 경고하는 대신 편안함의 청구서를 조용히 내미는 영화가 13년 뒤에도 낡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김범수 기자 · Breath.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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