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9년, 한 사내가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기어가듯 건넌다. 「하얼빈」의 첫 장면이다. 카메라는 영웅의 결의를 비껴가고, 얼음 위에서 무너지는 몸을 오래 들여다본다.
우민호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이다. 2024년 9월 8일 토론토 영화제 갈라 부문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됐고, 같은 해 12월 24일 국내 극장에 걸렸다. 현빈이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을 맡았고 박정민·조우진·전여빈·유재명·이동욱이 동지들의 얼굴을 나눠 진다. 이토 히로부미 역에 릴리 프랭키를 앉힌 캐스팅은 적을 괴물로 그리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도입부는 승리의 기록이 아니다. 안중근은 포로가 된 일본군 장교 모리 다쓰오를 처형하지 않고 풀어 주었고, 살아 돌아간 모리는 부대를 이끌고 와 동지들을 포격으로 몰살한다. 남은 이들은 지도자의 행방과 마음을 의심하고, 돌아온 그는 지휘권을 의심받는다.
신념을 지켜 사람을 잃은 자가 다시 신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영화는 여기서 출발한다.
제작 조건부터가 그 물음을 감당하겠다는 규모였다. 제작비 300억원이 들었고, 촬영은 여섯 달에 걸쳐 몽골과 라트비아, 한국을 오갔다. 눈과 추위가 있는 곳만 골라 찍었다는 말이 제작진에게서 나왔고, 현장 기온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다.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아이맥스 포맷으로 제작된 작품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상업영화는 사료를 옮기지 않는다. 사료가 비워 둔 시간, 강을 건너던 며칠과 서로를 의심하던 밤을 배우의 얼굴로 메운다. 그렇게 메운 얼굴이 교과서 삽화보다 오래 남는다. 광복절이 지나간 8월에 이 영화를 다시 꺼내는 이유다.
화면은 그 메움을 정직하게 밀고 간다. 홍경표의 촬영은 흰 벌판과 검은 외투, 낡은 나무와 젖은 흙의 재질을 끝까지 붙든다. 제61회 백상예술대상은 이 영화에 작품상을, 촬영을 맡은 홍경표에게 영화부문 대상을 안겼고 청룡영화상 촬영조명상도 같은 화면에 돌아갔다.
인물 배치도 흥미롭다. 이토 히로부미는 극의 정점에 놓이되 실제 위협은 모리 다쓰오가 감당한다. 거대한 이름 대신 집요한 개인을 추격자로 세우면서, 제국이 사람을 통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다. 웅변하지 않는 안중근을 만들어낸 현빈은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과 인기스타상을 함께 받았다.
아쉬움도 있다. 겨울의 물성을 그토록 공들여 쌓아 놓고 동지 개개인의 내력은 얇게 지나간다. 무기를 대던 공부인, 대동공보를 지탱한 최재형과 이강 같은 이름은 실존 인물의 비중에 비해 화면에서 짧게 소비된다.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와 청나라 마적단까지 끌어들인 지리적 야심에 견주면, 인물의 밀도가 풍경의 밀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성적도 그 간극을 따라 움직였다. 개봉 뒤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이듬해 1월 한 달 동안 207만 명을 모아 월간 1위를 지켰지만, 최종 누적 관객은 491만 명에서 멈췄다. 알려진 손익분기점은 650만 명이었다. 볼거리를 앞세운 대작의 셈법으로 보면 미달이고, 얼굴을 앞세운 영화의 셈법으로 보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남기는 온도는 영웅의 조각상이 아닌 흔들리는 사람들의 것이다. 역사영화는 정확히 재현할수록 지루해지고 극적으로 각색할수록 사실에서 멀어진다. 「하얼빈」은 사건의 뼈대를 건드리지 않는 대신 사건 사이의 여백을 각색하는 쪽을 택했고, 그 선택은 대체로 성공했다.
2025년 4월 넷플릭스에 올라온 뒤로는 극장의 어둠과 아이맥스의 화면비를 걷어낸 조건에서 이 영화를 만나는 관객이 더 많아졌다. 동지들의 얼굴이 끝내 배경으로 밀려난 자국은 화면이 작아져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발소리는 상영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무엇을 해냈는가가 아닌, 무엇을 잃고도 계속 걸었는가를 이 영화는 붙잡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