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백으로 찍힌 반원형 계단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휘어 오른다. 칸마다 회색 타일이 촘촘하고, 그 위를 은빛 난간 세 줄이 비스듬히 가로지른다. 왼쪽 아래 바닥에는 뚜껑 없는 콘크리트 원통 하나만 섰고,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가 흐리다. 구름 낀 한낮쯤일 것이다.
이런 계단 밑에 서면 눈이 저절로 맨 윗줄까지 끌려 올라간다. 시선이 꼭대기에 닿는 그 몇 초 사이에 숨은 가슴 위쪽에서 짧게 끊긴다. 어깨는 귀 쪽으로 반 뼘쯤 들리고, 발바닥은 첫 칸을 밟기도 전에 종아리를 단단히 조여 둔다.
몸은 맨 아래 칸에 있는데 마음은 벌써 꼭대기 난간 끝에 가 있어서, 그 사이 열 몇 칸을 한꺼번에 다 오른 사람처럼 지친다.
그래서 오르기 전에 한 번 앉는다. 사진 속 계단처럼 돌이나 타일로 된 첫 칸이라면 바지 너머로 올라오는 서늘함이 가장 또렷하다. 두 손을 무릎에 펴 얹고 숨을 세 번 길게 내보내는 동안, 눈은 꼭대기 대신 발끝의 타일 두세 장에 머문다.
삼 분이 채 안 걸린다. 오늘 오를 계단 첫 칸에 잠깐 앉았다 일어나도, 지나가는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저녁 퇴근길, 지하철역 출구 계단 밑에서도 같은 일을 해 볼 수 있다. 앉기 어려운 곳이면 첫 칸에 한 발만 올리고 왼손으로 난간을 쥔 채 숨을 두 번 내보낸다. 그때는 턱을 지켜본다.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어금니가 맞붙는지, 숨이 빠져나갈 때 그 힘이 조금 풀리는지를 보기만 한다.
텅 빈 회색 계단은 누가 앉았다 가도 칸 하나 줄어들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