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서른 살의 사회복지사가 병상 곁에 앉아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바르샤바 게토를 빠져나와 런던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데이비드 타스마는 암으로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500파운드를 물려주며 그 돈이 그녀의 집에 낼 창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훗날 세인트크리스토퍼 호스피스 입구에는 아무 무늬도 없는 유리판 한 장이 놓였다.
시슬리 손더스(Cicely Saunders, 1918~2005)는 하트퍼드셔 바넷에서 태어났다. 1938년 옥스퍼드 세인트앤 칼리지에서 정치·철학·경제를 공부하다 전쟁 중 간호사가 되기로 하고 세인트토머스 병원의 나이팅게일 간호학교에서 훈련받았다. 허리를 다친 뒤 학교로 돌아가 1945년 학사를, 1947년 의료사회복지사 자격을 얻었고, 서른아홉이던 1957년에 의사가 됐다.
간호사와 사회복지사와 의사를 차례로 통과한 사람은 드물다. 1967년 그녀가 세운 세인트크리스토퍼 호스피스는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용도에 맞춰 지은 건물이었다.
Q1. 1948년 데이비드 타스마가 물려준 500파운드가 호스피스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병상 곁에서 사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 돈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요?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창문을 말했어요. 밖이 보이는 자국을 하나 내달라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사회복지사였고, 1940년대 후반부터 베이스워터의 세인트루크 요양원에서 시간제로 일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죽으러 오는 곳이었어요. 통증을 미리 막지 않고 비명이 터진 다음에야 약을 주는 관행을 거기서 매일 봤습니다. 그 방식을 바꾸려면 처방권이 필요했고, 1951년에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세인트크리스토퍼 입구의 유리판 한 장이 건물 전체가 왜 서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Q2. 선생님이 제안한 '총체적 고통'은 신체·정서·사회·영적 괴로움을 하나로 묶습니다. 해크니의 세인트조지프 호스피스에서 7년간 통증 조절을 연구하셨는데, 그 현장에서 이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환자들에게 아픈 데를 물으면 몸 이야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집세 걱정, 며느리와의 다툼, 신앙이 흔들린 밤이 같이 나왔어요. 진통제를 늘려도 그런 것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세인트조지프에서 제가 붙든 것은 규칙적 투여였습니다. 통증이 돌아오기 전에 다음 용량을 주는 방식이죠. 그렇게 몸의 괴로움을 눌러놓으면 그제야 나머지가 보입니다. 통증 조절은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통증을 윤리의 문제로 다뤄본 적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아프다는 말을 의학의 실패로만 읽던 시대에, 그 말은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신호였습니다.
Q3. 에이즈가 확산되던 시기, 선생님은 세인트크리스토퍼가 에이즈 환자를 입원시키는 데 유보적이었고 소관 부처에 그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그 결정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제가 쓴 문장은 남아 있습니다. 기존 입원 시설을 에이즈 환자에게 쓰는 데 강한 유보가 있다고 적었어요. 병동이 가족과 아이들이 함께 머무는 매우 사적인 공간이고, 다른 가족들이 두려움 탓에 오지 못할 수 있다는 이유를 댔습니다.
그 두려움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저 자신도 문서에 적었습니다. 비이성적인 줄 알면서 그것을 운영의 근거로 삼은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평생 말해온 제가, 특정 병명에는 문턱을 뒀습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세운 원칙이 제 결정보다 컸고, 결국 원칙 쪽이 옳았습니다.
Q4. 1960년 안토니 미흐니에비치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아버지를 잃으신 뒤, 스스로 병적인 애도 상태였다고 표현하셨습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통과하셨는지요?
환자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안토니가 떠나고 아버지가 떠나고 친구까지 떠난 동안 저는 제대로 서 있지 못했습니다. 애도가 병처럼 굴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배운 것이 있습니다. 몸이 약해질수록 정신은 오히려 강해진다는 것. 안토니의 마지막 날들이 저에게 그걸 보여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무너지기만 하는 존재라는 통념이 제 눈앞에서 깨졌습니다.
계획은 그 전부터 있었습니다. 11년을 생각한 끝에 설계를 마쳤고, 시편 37편을 읽고 자금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보건부 부수석의무관이던 앨버틴 위너가 도왔고, 훗날 세인트크리스토퍼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Q5. 완화의료가 다루는 여러 증상 가운데 숨 가쁨을 특히 어려운 문제로 꼽으셨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숨이 막히는 사람은 말을 못 합니다. 통증은 위치를 가리킬 수 있지만 숨 가쁨은 문장을 끊어버려요. 총체적 고통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증상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숨은 옆에 있는 사람까지 붙듭니다. 환자가 헐떡이면 가족이 밤새 그 소리를 듣습니다. 병실 하나에서 두 사람이 함께 지칩니다. 완화의료가 환자와 가족을 같이 돌본다고 할 때, 그 말이 가장 구체적으로 만져지는 증상이 호흡곤란입니다.
세인트크리스토퍼를 지을 때 정원을 넣고 머리를 손질할 곳을 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환자가 화단에 앉아 바깥 공기를 쐬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합니다. 병원보다 집에 가까운 곳을 만들려 했습니다.
Q6. 완화의료에 닿지 못하는 환자는 지금도 많습니다. 오늘의 의료가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완화의료를 마지막 며칠의 일로 여기는 습관입니다. 세인트크리스토퍼는 처음부터 교육과 임상연구를 함께 하도록 설계됐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돌보는 일에도 연구가 필요하다는 뜻이었어요.
진행성 질환을 앓는 사람은 진단을 받은 그날부터 증상 관리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병이 다 진행된 다음에 의뢰서를 쓰면 늦습니다. 환자와 가족을 얼마나 일찍 만나느냐가 관건입니다.
저는 자발적 안락사 합법화에 반대했습니다. 신앙 때문만은 아닙니다. 효과적인 통증 조절이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양쪽 모두 불필요한 고통과 존엄의 상실에 반대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Q7. 세인트크리스토퍼는 환자가 정원을 가꾸고 글을 쓰고 이야기하는 곳으로 지어졌습니다. 다음 세대에 무엇이 이어지기를 바라십니까?
병동이 병동처럼만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자를 시설로 옮겨놓았다는 감각이 들면 그곳은 그 순간 실패한 겁니다.
환자들은 복도를 지나 정원으로 나갑니다. 바깥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숨을 고릅니다. 그 통로가 계속 열려 있으면 됩니다.
1967년 세인트크리스토퍼가 문을 연 이래, 완화의료는 하나의 전문 진료과가 됐고 상황에 맞게 형태를 바꿔가며 퍼졌다. 그 출발점은 죽어가던 웨이터가 건넨 500파운드와 창문이라는 한마디였다.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소중하다는 문장은 지금도 저 유리판 너머에 서 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시슬리 손더스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녀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