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3년, 가봉의 강가 마을 랑바레네에 닿은 서른여덟 살의 의사는 병원 건물을 새로 짓지 못했다. 선교사가 쓰던 닭장을 손봐 진료실로 삼았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한 흑인 간호조무사 누쳉이 환자의 말을 옮겨주었다. 유럽에서 철학박사와 신학박사를 받고 오르간 연주자로 이름이 있던 사람이 열대의 습기 속에서 청진기를 들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1875년 알자스 카이세르스베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965년 세상을 떠났다. 1899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를, 이듬해 예수 연구로 신학박사를 받았고 목사와 신학부 강사를 지냈다. 서른 살이던 1905년 의학 과정에 들어가 1913년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다. 저술과 강연, 오르간 연주와 음반 수입으로 병원을 자력으로 꾸렸고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Q1. 스물한 살에 서른까지는 학문과 예술 속에서 살고 그 후로는 봉사에 들어가겠다고 정하셨습니다.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아홉 해가 걸렸는데, 무엇이 그 시간을 버티게 했습니까?
결심 자체는 짧았습니다. 군 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집에서 보내다가,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난한 농부들이 교우의 대부분이던 교회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성찬예배 때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자주 설교하셨습니다. 그 감정이 어른의 결정으로 굳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1905년에 의학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서른 살에 다시 학생이 되는 일은 우스운 데가 있습니다. 신학부 강사가 해부학 실습실에 서 있으니 동료들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일과 열이 오른 사람의 배를 만지는 일은 똑같이 필요합니다.
Q2. 랑바레네의 첫 병원은 닭장을 고쳐 쓴 건물이었습니다. 그 뒤 병원이 커진 것은 어떤 필요에서 시작됐는지요?
환자가 왔기 때문입니다. 계획서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강을 타고 며칠씩 걸려 실려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 없어 침상을 늘렸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받다 보니 건물이 늘어난 것입니다.
제 이름이 붙은 병원이지만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유럽에서 온 의료진과 이름이 기록에 잘 오르지 않는 현지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통역을 해준 누쳉이 없었다면 저는 첫해 환자의 증상조차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운영비는 유럽으로 돌아가 연주회를 열어 벌었습니다. 바흐를 치고 그 돈으로 약을 샀습니다. 1924년에 돌아와 보니 병원은 뼈대만 서 있었는데, 전후 복구로 각자 형편이 어렵던 유럽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주어 다시 세웠습니다.

Q3. 랑바레네의 의료 수준이 과대평가됐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인도주의를 앞세운 것뿐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 지적을 어떻게 받으십니까?
진료 수준에 대한 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물자와 약품이 늘 모자랐고, 대전의 여파로 보급이 끊기는 해도 있었습니다. 유럽의 잘 갖춰진 병원과 견주면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이 하나도 없는 것과 초라한 병원이 하나 있는 것의 차이는 환자에게 작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야심이라는 비판은 조금 억울합니다. 존경을 원했다면 유럽의 강단에 남는 편이 훨씬 쉬웠습니다. 저는 기독교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이웃의 유대 상인이 모욕을 받으면서도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것을 보았고, 그때 용서만이 갈등을 넘어서는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Q4. 1916년 어머니가 프랑스 군인들의 군마에 치여 돌아가셨고, 1917년에는 선생 자신이 포로수용소에 갇히셨습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오셨습니까?
알자스는 독일과 프랑스가 번갈아 가져간 땅입니다. 저는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고향이 프랑스 영토였다는 이유로 구금됐습니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랑바레네의 환자들은 진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전쟁이 제게 준 가장 깊은 상처입니다. 사람을 죽이려 기른 말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저는 그때 인간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몸으로 알았습니다.
회복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1924년에 다시 배를 탔을 뿐입니다. 뮐루즈 시절 저에게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준 베만 선생님은 대전 중 굶주림과 정신의 병으로 무너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그분을 생각하면 제가 돌아갈 곳은 랑바레네뿐이었습니다.
Q5. 나무에 그물침대를 걸면 나무가 아프다고 하셨다지요? 생명 외경이 그렇게 작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이유가 있는지요?
큰 것에서 시작하면 사람은 반드시 예외를 만듭니다. 이 생명은 희생돼도 된다는 목록이 생기고, 그 목록은 늘 길어집니다. 저는 희생되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고 봅니다.

더운 날, 나무 사이에 그물침대를 걸려는 사람에게 저는 나무가 아플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게 들렸겠지만, 나뭇가지 하나를 함부로 꺾지 않는 손이 사람의 몸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Q6. 브레스저널은 숨과 쉼을 다룹니다. 공기의 질도, 회복할 시간도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집니다. 강을 며칠 타고 온 환자를 받으셨던 경험에서 지금 무엇을 보십니까?
제 병원까지 사흘이 걸린 사람과 반나절이 걸린 사람은 같은 병이라도 다른 결과를 얻었습니다. 거리는 그 자체로 병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은 숨이 가빠졌을 때 한 시간 안에 산소를 받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합니다. 병원의 수준을 말하기 전에 누가 그 문에 닿을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쉼도 그렇습니다. 저는 유럽으로 가서 연주를 하고 돌아왔지만, 병원의 현지 직원들에게는 그런 왕복이 없었습니다. 회복할 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만 주어지면 그것은 특권입니다.
Q7. 오늘의 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건네고 싶으신지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각자 사정이 있습니다. 생명이 소홀히 다뤄지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화가 나는 사람이 있을 때 역사가 움직인다고 저는 믿습니다.
랑바레네의 창밖은 언제나 강이었고 진료실에는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방에서 바흐를 들을 때면 저는 닭장을 고쳐 만든 첫 진료실을 떠올렸습니다. 지붕은 낮았지만 문은 늘 열려 있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지키는 작은 것 하나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정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