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목조가 버틴 천 년을 손으로 재는 일

편집부·입력 2026. 04. 20. 오후 3:40:00
중국 첫 여성 건축가 린후이인이 말하는 고건축 조사와 유산 보존
린후이인(1904~1955)
린후이인(1904~1955) / 사진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런던의 하숙집에서 열여섯 살 소녀는 집주인 여자가 그리는 도면을 어깨너머로 보았다. 1920년 봄, 아버지 린창민을 따라 유럽으로 건너간 참이었다. 종이 위에서 벽과 지붕이 선으로 세워지는 광경은 그가 읽던 시집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붙잡고 있었다. 그 방이 훗날 산시의 흙길과 낡은 절집으로 이어질 줄은 본인도 몰랐다.

린후이인(林徽因·1904~1955)은 항저우에서 태어나 푸젠 민허우 집안의 딸로 자랐다. 1924년 펜실베이니아대학에 들어가 미술과에 적을 두고 건축 과목을 들었고, 예일대학에서 무대미술을 공부했다. 량쓰청과 함께 1928년 둥베이대학 건축과에 섰고, 신월사와 경파 문인들 사이에서 시와 산문을 썼다.

중국건축학회 소장 자료를 량쓰청과 함께 읽어 나가다 오대산 불광사를 찾아냈다. 1949년 이후 칭화대학 교수로 국가 휘장과 인민영웅기념비 설계에 참여했고, 병으로 쉰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Q1. 1920년 런던에서 하숙집 여주인에게 건축을 권유받으셨습니다. 시를 쓰던 소녀가 왜 건축으로 돌아섰습니까?

시는 제 안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건축은 제 밖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런던의 세인트메리 여학교에 다니던 무렵 서양 문학을 잔뜩 읽었는데, 읽을수록 사람이 실제로 몸을 누이는 방 한 칸이 궁금해졌습니다. 하숙집 여주인은 자기 일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종이 위에 벽을 세우고 지웠습니다.

그 손놀림에 끌렸습니다. 문장은 고쳐 쓰면 그만이지만 잘못 세운 기둥은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책임이 무겁다는 사실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1921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페이화 여학교로 복학한 뒤에도 그 생각은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Q2. 1928년 둥베이대학에서 량쓰청과 함께 옛 문헌을 뒤져 당대 건축을 추적하셨고 오대산 불광사에 이르셨습니다. 조사라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일이었는지요?

먼지 냄새로 시작합니다. 오래된 목조 안으로 들어가면 마른 나무와 향, 박쥐 배설물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칩니다. 두공을 올려다보며 눈으로 세고, 사다리를 걸어 올라가 손으로 만져 보고, 자로 재서 적습니다. 나무는 손바닥에 서늘하고 결이 굵게 잡힙니다.

문헌에 적힌 이름만으로는 건물이 어디 남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수백 개의 당대 건물과 지명을 량쓰청과 나눠 읽으며 어디에 무엇이 남았을 법한지 짐작하고, 그 짐작을 들고 흙길을 걸었습니다. 대개는 헛걸음이었습니다.

불광사에서는 서까래 아래 어둠 속에서 오래된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의 심정을 시로 쓰지 않은 것이 지금도 이상합니다. 도면을 그리느라 손이 바빴던 탓이겠지요.

1937년 산시성 우타이산 불광사에서 경당을 실측하는 린휘인
1937년 산시성 우타이산 불광사에서 경당을 실측하는 린휘인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

Q3.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는 건축을 배우면서도 학적은 미술과에 있었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화를 냈습니다. 오래 냈습니다. 배우는 내용과 문서에 적히는 이름이 어긋난다는 사실을 저는 끝내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제 한계도 있었습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유럽을 다녔기에 저는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시절 대다수 여성에게는 그런 통로가 없었습니다. 제가 받은 부당함을 말할 때마다 제가 누린 몫도 함께 말해야 공평합니다.

Q4. 문서에 적히는 이름이 어긋났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자기 일을 남기는 방식이 달라졌는지요?

도면과 조사 기록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재고 더 많이 그렸습니다. 시와 산문도 계속 썼습니다. 건축과 문학은 저에게 같은 태도였습니다.

몸이 무너진 뒤로는 재는 일을 남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1949년 이후 칭화대학에서 량쓰청과 옛 건물의 수리를 붙들었지만, 저는 자주 누워 있었습니다. 손이 못 가는 곳을 말로 채우는 법을 그때 배웠습니다.

Q5. 국가 휘장과 인민영웅기념비 설계에 참여하셨고, 동시에 옛 건물을 지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새로 세우는 일과 남기는 일은 부딪히지 않았습니까?

부딪혔습니다. 도시는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새것을 원합니다. 낡은 담과 낡은 절집은 길을 막고 돈을 먹습니다. 그 사정을 모르고 보존을 말하면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옛 기법을 새 일감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칠보 공예가 그런 경우입니다. 오래된 기술은 박물관에 눕혀 두면 죽고, 오늘의 손이 쥐면 삽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것이 조금씩 닳는다는 사실도 압니다.

닳는 것을 감수하고 쓰느냐, 온전히 두고 잊히느냐. 저는 어느 한쪽을 깨끗한 답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투면서 가는 편이 정직합니다.

1935년 톈탄에서 함께한 량쓰청과 린휘인
1935년 톈탄에서 함께한 량쓰청과 린휘인 / 사진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Q6. 2026년 오늘, 도시는 훨씬 빠르게 헐리고 유산은 관광 상품이 되었습니다. 손으로 실측하던 조사자로서 지금의 보존을 보면 어떠십니까?

기계가 훨씬 정밀하게 잴 것입니다. 부럽습니다. 그런데 재는 것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사다리에 올라 처마 밑 어둠에 코를 대 본 사람만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 건물이 어떻게 비를 흘려보내고 어디서부터 썩기 시작하는지는 몸이 압니다.

유산이 돈이 되는 것을 나쁘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돈이 되지 않으면 지키자는 사람도 사라집니다. 관건은 벌어들인 것이 다시 그 건물의 기둥으로 돌아가느냐입니다. 표를 팔아 광장을 넓히고 정작 서까래는 썩게 두는 일이 흔할 것입니다.

한 채를 복원하면 손상된 부재를 뜯어냅니다. 그 부재가 품고 있던 시간도 함께 나갑니다. 새 나무로 갈아 끼우기 전에, 뽑아낸 헌 나무를 며칠쯤 들여다보는 사람이 그 현장에 있었으면 합니다.

Q7. 2024년 그 대학이 당신에게 건축 학사를 주었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으신지요?

백 년이 걸리는 일이 있다는 것. 그 사이 저는 죽었고 그래도 종이는 왔습니다. 조카 마야 린이 워싱턴에 세운 검은 벽처럼, 어떤 것은 늦게 도착합니다.

사다리 하나면 됩니다. 오래된 지붕 밑에 걸치고 올라가 서늘한 나무에 손을 대 보십시오.

불광사는 산시성 오대산에 여전히 서 있다. 두공은 여전히 어둡고, 여름 오후의 목재 냄새는 그가 사다리를 올리던 시절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면은 사람이 그리지만 나무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사다리를 올려다볼 사람은 늘 부족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린휘인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편집부 · Breath.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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