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발견은 멈출 수 없지만 쓰임은 사람이 정합니다

편집부·입력 2026. 04. 12. 오후 4:30:00
핵분열을 설명한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와의 대화
리제 마이트너(1878~1968)
리제 마이트너(1878~1968) / 일러스트 ⓒ 브레스저널

1938년, 한 사람이 국경으로 향하는 기차에 앉아 있었다. 30년 넘게 쌓아 올린 연구실도, 독일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얻은 정교수 직함도 두고 나온 길이었다. 주머니에는 10마르크와 오토 한이 쥐여준 그의 어머니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국경에서 막히면 뇌물로 쓰라는 것이었는데, 끝내 쓸 일은 없었다.

리제 마이트너는 1878년 빈 레오폴트슈타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여덟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여성에게 공립 고등교육의 문이 닫혀 있던 시절 사교육으로 물리학을 익혀 1901년 김나지움 졸업시험을 통과했고, 빈 대학교에서 오스트리아의 두 번째 여성 박사가 되었다. 베를린에서 막스 플랑크의 조교로 출발해 화학자 오토 한과 프로탁티늄의 안정 이성질체를 찾아냈고, 1926년 독일 최초의 여성 정교수가 되었다. 안슐루스 뒤 뉘른베르크 인종법의 대상이 되어 스웨덴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조카 오토 로베르트 프리슈와 함께 핵분열이 무엇인지를 세계에 설명했다.

Q1. 국경을 넘던 날을 여쭙습니다. 더크 코스터가 독일 관리에게 선생님의 통과 자격을 보증했지요? 몇 달 전만 해도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 물리학부장이셨습니다. 그 하루가 인생을 갈랐다고 보십니까?

갈랐습니다. 저는 오스트리아 국적이라 독일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며 몇 해를 버텼습니다. 실라르드 레오도, 프리츠 하버도, 조카 프리슈도 쫓겨난 뒤였는데 저만 남아 있었지요. 합방으로 하룻밤 사이 독일인이 되자 그 예외가 사라졌습니다.

기차 안의 저는 학자라기보다 짐 없는 여자였습니다. 지위와 재산을 두고 몸만 빠져나왔으니까요. 흐로닝언 대학교에 임용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에바 폰 바어와 칼 빌헬름 오젠의 주선으로 스톡홀름에 닿았습니다.

거기서도 편치 않았습니다. 만네 시그반의 연구소에 몸을 두었는데, 그분은 여자가 물리학을 한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남의 처마 밑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Q2. 그 처마 밑에서 핵분열의 해석이 나왔습니다. 1938년 12월 한이 바륨이 나왔다는 편지를 보내왔고, 선생님은 프리슈와 함께 준경험적 질량공식으로 답을 냈습니다. 그 며칠 동안 무엇을 붙들고 계셨는지요?

한의 편지는 곤혹이었습니다. 우라늄에 중성자를 때렸는데 바륨이 나온다니요. 화학자로서 그의 검출은 정확했지만 그는 그 결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저와 프리슈는 그가 보내온 내용에 준경험적 질량공식을 대입해 보았습니다.

양성자가 너무 많아지면 서로 밀어내는 힘이 핵을 붙잡는 강력을 넘어섭니다.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가 자연에 얌전히 있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쪼개진 조각의 질량을 모두 더해도 원래보다 모자랐고, 사라진 그만큼이 에너지로 나옵니다. 아인슈타인의 식이 거기에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중성자를 맞은 우라늄 핵은 바륨과 크립톤으로 갈라지며 중성자 여러 개와 막대한 에너지를 냅니다. 저희는 그 해석을 1939년 초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12월에 보어가 보낸 편지가 실마리였는데, 나오는 에너지가 예측보다 훨씬 크다는 지적이었지요.

1913년 베를린 카이저빌헬름 화학연구소 실험실의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한
1913년 베를린 카이저빌헬름 화학연구소 실험실의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한 / 사진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저는 기뻐하기보다 등이 서늘했습니다. 중성자가 또 중성자를 부른다면 어디서 멈추는지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Q3. 핵분열은 원자력 발전의 원리인 동시에 핵무기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밝힌 설명이 무기로 쓰인 일을 두고, 발견한 사람의 책임은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제 손이 깨끗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1935년 한과 우라늄 너머를 뒤지기 시작했을 때 저희는 새 원소를 찾는 경쟁 중이었습니다. 러더퍼드도, 이렌 졸리오퀴리도, 페르미도 같은 것을 쫓았습니다. 노벨상감이라는 생각은 했어도 무기를 떠올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발견은 멈출 수 없지만 쓰임은 사람이 정합니다. 유감을 표하는 말이 얼마나 가벼운지는 저도 압니다. 그래서 연구자는 자기가 열어둔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끝까지 눈을 떼면 안 됩니다.

Q4. 1944년 핵분열 공로로 시상된 노벨 화학상은 한 사람에게만 돌아갔습니다. 수상자 세 명 제한에 막힌 사정도 없었기에 위원회는 과학자와 언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 견디셨는지요?

한이 상을 받을 자격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실험을 해낸 사람은 그였으니까요. 그러나 그 과정이 왜 그토록 큰 에너지를 내는지 밝힌 일은 화학의 영역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화학과 물리에 걸친 연구를 심사하는 위원회는 한쪽 언어만 알아들었던 듯합니다. 1922년 제가 밝힌 전자 방출 현상도 이듬해 같은 것을 찾아낸 오제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두 번 겪으니 사람이 담담해집니다.

계속 연구했습니다. 스웨덴 시민권은 몇 해 뒤에 받았고, 그동안 손에서 놓은 것은 없습니다.

Q5. 이름이 붙지 않은 기여도 많습니다.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는 한동안 무급 객원이셨고, 채드윅이 중성자를 증명하려 할 때는 폴로늄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일을 계속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객원이던 시절에는 급여가 없어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으로 지냈습니다. 그래도 실험실 열쇠는 제 손에 있었지요. 채드윅에게 폴로늄을 보낸 것은 그가 중성자를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1932년 뮌스터 국제 분젠학회 방사능 학술대회에 참석한 마이트너와 러더퍼드, 한 등
1932년 뮌스터 국제 분젠학회 방사능 학술대회에 참석한 마이트너와 러더퍼드, 한 등 / 사진 Friedrich Paneth · 퍼블릭 도메인

1차 대전 때는 엑스선 장비를 다루는 간호원으로 지냈습니다. 1916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연구를 이으려 했지만, 그 몇 해가 남긴 내적 갈등은 오래 따라다녔습니다. 실험실 책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사람의 몸을 통과하던 그 빛이 떠올랐습니다.

Q6. 2026년 오늘, 여러 나라가 기후 대응을 이유로 원자력 확대를 말합니다. 방사능을 평생 다루신 분으로서 이 논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같은 현상에서 무기도 나오고 발전도 나옵니다. 한쪽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느 편이든 절반을 감추고 있습니다. 저는 에너지를 얻는 일 자체를 반대해본 적이 없습니다.

관건은 다루는 사람의 정직함입니다. 저는 1907년 알파입자 산란 논문을 쓸 때부터 결과가 기대와 어긋나면 기대를 버렸습니다. 한이 바륨을 검출하고도 스스로 믿지 못한 것은 정직했기 때문이고, 그 정직 덕분에 저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원자력을 두고 재앙만 말하거나 안전만 말하는 논의에는 그 정직이 빠져 있습니다. 폐기물이 몇 년을 가는지, 사고가 나면 누가 그 땅에 남는지를 함께 놓고 따져보십시오. 그러고도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그것은 정당한 결론입니다.

Q7. 지금 실험실에 앉아 있는 젊은 연구자에게 무엇을 남기시겠습니까?

여덟 살 무렵 저는 베개 밑에 노트를 두고 기름막에 뜨는 색을 들여다봤습니다. 그 아이는 알고 싶어서 봤을 뿐, 무엇에 쓰일지는 몰랐습니다. 그 마음은 지키되, 자기 결과가 세상에 나가 무엇이 되는지는 매일 물어야 합니다.

1997년 109번 원소에 제 이름이 붙었습니다. 원소는 사람을 기억해 주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매번 살아 있는 사람이 정합니다. 오늘 실험실을 나서기 전에 한 번만 그 물음을 적어보십시오. 저는 그것을 너무 늦게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리제 마이트너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녀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편집부 · Breath.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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