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7년 아이치로 돌아온 스물넷의 여성이 나고야 신문사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신문의 첫 여성 기자였다. 몇 해 뒤인 1920년, 그는 히라쓰카 라이초와 함께 신부인협회를 세운다. 여성의 정치 참여를 막는 법을 고치겠다는 단체였고, 바로 그 법 때문에 회원들은 자기 단체의 집회조차 열 수 없었다.
이치카와 후사에(Fusae Ichikawa, 1893~1981)는 아이치현 비사이시에서 태어났다. 아이치 여성 교사 학원을 다니며 초등학교 교사를 꿈꿨으나, 1910년대 도쿄로 옮기면서 여성운동을 만났다. 1924년 미국에서 돌아와 일본부인유권자동맹을 만들었고, 1930년 여성 선거권을 주제로 한 첫 전국 대회를 열었다.
1945년 11월 여성에게 완전한 참정권이 주어졌고, 1953년에는 도쿄에서 참의원에 뽑혔다. 1974년 막사이사이상 민주주의 부문을 받았고, 1980년 참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최다 득표로 다시 당선됐다.
Q1. 1920년 신부인협회를 세웠을 때, 회원들은 정치 집회를 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연 회의"라는 형식을 만드셨다고요?
법이 여성의 정치 결사와 집회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 법을 고치자고 모이는 것 자체가 그 법에 걸렸지요. 우스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웃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강연 회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치 집회를 여는 대신 배우는 모임이라는 형식을 취했지요. 형식을 하나 찾아내면 그 안에서 말할 수 있는 분량이 생깁니다. 1922년 제국의회가 그 조항을 고쳤고, 협회는 목적을 이뤘으니 해산했습니다.
Q2. 1924년 미국에서 앨리스 폴을 만나려 하셨고, 돌아와 국제노동기구 도쿄지부에서 일하며 일본부인유권자동맹을 만드셨습니다. 미국에서 본 것 가운데 무엇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운동에도 조직의 기술이 있다는 것을 봤습니다. 뜻이 뜨거운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 뜨거움을 명부와 회비와 회의록으로 바꿔놓지 않으면 한 세대가 지나는 사이에 흩어집니다.
돌아와서 만든 일본부인유권자동맹이 일본 최초의 여성 참정권 단체였습니다. 1930년에는 전국 대회를 열었습니다. 사람을 모으는 일보다 다음 해에도 그 사람들이 다시 모이게 만드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노동 문제를 다루는 사무실에서 일하며 여성의 표를 이야기한 것도 저에게는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Q3. 전쟁 중 민족정신동원중앙회 총무를 맡으셨고, 대일본부인협회 이사도 지내셨습니다. 전후 점령 당국은 그 이력을 이유로 선생을 공직에서 배제했습니다. 그 처분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요?
그 명부에 제 이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전쟁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넓히려고 정부가 만든 조직이었고, 저는 그 조직의 총무였습니다. 여성 단체가 국가와 손을 잡으면 여성의 발언권이 늘어난다고 여겼습니다. 늘어난 것은 동원의 통로였습니다.
점령이 끝날 때까지 정치와 정부 기관에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억울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여성에게 정치적 권한이 있었다면 그토록 파괴적인 전쟁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전쟁을 뒷받침하는 조직의 사무를 봤다는 사실은 제 손으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Q4. 1971년 참의원 재선에 실패해 물러나셨고, 1974년 여든하나에 다시 출마 요청을 받으셨습니다. 그 세 해를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떨어진 다음 날에도 하던 일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여성 회의는 국내에서도 밖에서도 계속 열렸고, 저는 나이 든 사람 몫으로 거기에 갔습니다. 의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과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 갈린다는 것을 그때 몸으로 배웠습니다.
1974년에 다시 나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망설였습니다. 여든 넘은 사람이 젊은 사람의 길을 막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요. 그래도 나갔고 네 번째 임기를 얻었습니다. 같은 해에 받은 상은 제 것이라기보다 그때까지 함께 걸은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Q5. 1933년 도쿄정계청산여성회를 만드시고, 정부의 선거청산중앙회에서 다섯 여성 이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참정권 운동가가 왜 선거 부패 문제에 그렇게 오래 매달리셨는지요?
표를 갖는 것과 표가 제대로 세어지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돈이 오간 선거에서 여성이 한 표를 얻어봐야 그 표는 값이 매겨진 물건이 됩니다. 저는 참정권 운동의 뒷면이 선거 정화라고 봤습니다.

1933년 도쿄에서 여성들과 함께 시작한 일이 나중에 정부 기관으로 이어졌습니다. 여성이 그 기관의 이사석에 앉았다는 사실도 저에게는 중요했습니다. 1953년 참의원에 들어간 뒤에도 제 안에서 한 번도 나뉜 적 없는 여성 의제와 선거 제도 개혁을 함께 다뤘습니다.
Q6.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여성의 의회 진출 비율이 인구 비율에 크게 못 미칩니다. 선거권은 있는데 대표가 없는 상태를 선생은 어떻게 보십니까?
1945년 11월에 참정권이 왔을 때 저는 그날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권리는 문을 여는 일이고, 그 문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 앉는 일은 따로 벌어집니다. 저 자신이 그 문 안에 들어가기까지 여덟 해가 걸렸습니다.
표를 던지는 사람과 표를 받는 사람이 같은 얼굴로 채워지지 않으면 회의장에서 나오는 결정도 한쪽으로 기웁니다. 1980년에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 협약을 정부가 비준하라고 목소리를 낸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나라가 서명한 문서 한 장이 곧 사람들의 하루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 문서를 근거로 삼아 따질 수 있게 되는 것, 저는 그만큼을 기대했습니다.
Q7. 1980년 전국구 최다 득표로 당선되셨습니다. 여든일곱의 나이였습니다. 그 표를 던진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1922년 제국의회가 법을 고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협회는 곧 해산했습니다. 목적을 이뤘으면 흩어지는 것이 옳다고 봤지요. 그리고 저는 처음부터 다시 조직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단체는 흩어져도 사람은 남습니다. 야마타카 시게리와 같이 일하던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오늘 표를 세는 손, 명부를 적는 손이 다음 문을 엽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이치카와 후사에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