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노래는 흙에서 캐내는 것입니다

편집부·입력 2026. 02. 23. 오전 9:50:00
칠레 민요를 채집한 비올레타 파라(1917~1967)
비올레타 파라(1917~1967)
비올레타 파라(1917~1967) / 사진 José Joaquín Cortes · CC BY-SA 4.0

1952년 어느 여름, 그는 칠레 시골 마을의 흙마당에 앉아 노인의 노랫가락을 받아적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공책과 연필, 그리고 오래 들어주는 귀였다. 그렇게 모은 노래들이 1957년 이후 '칠레의 민속' 연작으로 묶여 나왔다. 죽고 나서야 세상이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비올레타 델 카르멘 파라 산도발은 1917년 10월 4일 칠레 남부 산카를로스에서 태어났다. 음악교사였던 아버지와 시골에서 자란 재봉사 어머니 사이, 아홉 남매 중 하나였다. 1927년 치얀으로 옮겨가 형제들과 기타를 잡았고, 1932년 오빠 니카노르의 권유로 산티아고에 올라왔다.

1955년 바르샤바 청년축전 초청을 계기로 파리에 머물며 음반을 녹음하고 루브르에 자신의 공예품을 걸었으며, 1960년에는 콘셉시온에 민속예술관을 세웠다. 1967년 2월 5일 스스로 삶을 끝냈고, 그의 생일은 훗날 칠레 음악인의 날이 되었다.

Q1. 1952년 이전에는 볼레로와 란체라, 스페인풍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오빠 니카노르의 권유로 그 목록을 통째로 버리셨다고요?

버렸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비올레타 데 마요'라는 이름으로 식당과 극장에서 남의 노래를 팔고 있었습니다. 롤리타 토레스의 곡을 흉내내면 박수가 나왔으니까요.

오빠가 말했습니다. 네 나라 노래는 어디에 있느냐고. 저는 그 말에 화가 났고, 화가 난 채로 짐을 싸서 시골로 갔습니다. 도시에서 유럽 음악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정작 우리 땅의 가락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 매년 몇 곡씩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Q2. 채집은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이사이아스 앙굴로라는 소작농에게 25현 기타론을 배우셨다고 들었습니다.

돈 이사이아스의 집은 흙바닥이었고, 기타론은 몸통이 크고 줄이 스물다섯 개라 처음엔 팔이 닿지 않았습니다. 나무는 손때로 검게 절어 있었고, 낮은 줄을 튕기면 방바닥이 함께 울렸습니다. 그런 소리는 악보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래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언제 어느 마당에서 불렀는지, 쿠에카를 출 때 발이 어디로 도는지까지 몸으로 익혔습니다. 1954년 라디오에서 프로그램을 맡았을 때도 녹음은 대부분 스튜디오 바깥에서 했습니다. 노래가 실제로 불리는 곳, 어머니가 하시던 바랑카스의 식당 같은 데를 찾아갔습니다.

1958년과 1959년에 쿠에카와 토나다를 따로 묶어 내놓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형식을 형식대로 살려두어야 다음 사람이 그 안에서 새 노래를 지을 수 있습니다.

Q3. 채집한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본인 곡으로 다시 지으셨습니다. 원형을 훼손한다는 말은 없었는지요?

있었습니다. 민속은 박제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제가 옛 형식을 빌려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고 순수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1957년 첫 음반에 제 곡 세 편을 슬쩍 끼워넣은 것도 그런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노래가 유리장 안에서 살아남는다고 보지 않습니다. 노인이 부르던 십행시 데시마를 제가 다시 지어 부르지 않으면, 그 형식은 저와 함께 끝납니다. 물론 제 손을 거치면서 무언가는 달라집니다. 그 책임까지 지고 가는 것이 채집하는 사람의 일입니다.

Q4. 산티아고 외곽에 세운 공연장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1965년 자녀들의 페냐 데 로스 파라스가 성공한 것과 대비됩니다.

이사벨과 앙헬의 카페는 시내에 있었고 젊은 사람들이 걸어서 왔습니다. 제 천막은 외곽이었고, 비가 오면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겨울에는 천이 젖어 무겁게 늘어졌고 안에서 입김이 보였습니다.

실패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노래를 들으러 먼 길을 와줄 것이라 믿었는데, 삶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1966년 그 천막에서 만든 음반이 남아 있으니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Q5. 파리 인류박물관에 기타론과 채집 테이프를 남기고, 루브르에는 손으로 만든 공예품을 거셨습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왜 바늘을 잡으셨습니까?

어머니가 재봉사였습니다. 아버지가 1930년 결핵으로 돌아가신 뒤 우리는 손으로 무엇이든 만들어야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실과 마대천, 굵은 바늘은 제게 기타만큼 익숙한 재료였습니다.

노래와 자수는 같은 일입니다. 둘 다 이야기를 담고, 둘 다 만든 사람의 손이 남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제 자수를 보고 놀란 이유는 그것이 미술관 물건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골 여자들이 부엌에서 하던 것을 벽에 걸었을 뿐입니다.

테이프를 파리에 두고 온 것은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곳이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Q6. 2026년의 문화유산 현장에서는 무형유산을 기록하고 관광 자원으로 쓰는 일이 함께 벌어집니다. 보존과 활용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하라고 하시겠는지요?

택하라는 말부터 틀렸다고 봅니다. 저는 노래를 캐내 라디오에 올렸고, 그것으로 유명해졌고, 그 유명세로 다시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알려지지 않으면 지킬 힘도 생기지 않습니다.

물론 경계는 있습니다. 노래를 부른 사람이 자기 노래가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는 채로 끝난다면 그것은 채집이 못 되고 그저 가져가는 일이 됩니다. 저도 그 선을 늘 잘 지켰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기록물을 쌓아두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 가락을 오늘 부르지 않으면, 테이프는 소리 없는 상자입니다.

Q7. 뒤에 올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으신지요?

남길 것을 정해두고 산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어느 마당에서 노인이 부르던 가락이 제 공책을 거쳐 이사벨의 목소리로 이어졌다면, 그 사슬이 한 칸 더 늘어난 것으로 충분합니다.

라 레이나에 제가 손수 지은 나무집이 있었습니다. 못을 박고 판자를 대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있습니다.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이라면 마포초 근처의 오래된 술집 골목이나, 콘셉시온 대학이 품고 있는 민속예술관을 한 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누군가 기타론의 낮은 줄을 튕기고 있다면, 제 일은 끝나지 않은 채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비올레타 파라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편집부 · Breath.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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