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케냐의 한 대학 해부학 교수가 강의실을 나와 흙을 팠다. 사막화가 번지는 땅에 묘목을 꽂았고, 삽을 쥔 사람은 대부분 시골 여성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린벨트 운동은 1,200만 그루를 심었고, 그가 평생 심은 나무는 3,000만 그루에 이른다. 묘목을 다루던 손이 어떻게 감옥까지 갔는지 본인에게 물었다.
왕가리 무타 마타이는 1940년 4월 1일 케냐 중부 고원 니에리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1960년 9월 미국 유학 장학생 300여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건너가 캔자스의 마운트 세인트 스콜라스티카 대학에서 1964년 학사를, 피츠버그 대학에서 석사를 마쳤다. 나이로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 여성 가운데 첫 박사가 됐고, 1971년 같은 대학 해부학 교수로 임명됐다.
2002년 총선에서 의원에 당선돼 이듬해부터 환경과 천연자원, 야생동물을 맡은 차관으로 일했다. 2004년 아프리카 여성으로 처음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2011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Q1. 1960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스무 살의 당신과, 학위를 마치고 케냐로 돌아온 당신 사이에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떠날 때 저는 장학생 300여 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식민 지배가 끝나가던 나라가 젊은 사람들에게 배워 오라고 보낸 것이었고, 저는 미국과 독일에서 생물학을 공부했습니다.
돌아왔을 때 저는 실험실 사람이었습니다. 해부학을 가르쳤고 1971년에는 나이로비 대학 교수가 됐습니다. 배운 것을 어디에 쓸 것인지는 학위가 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망가진 것을 사람이 만들었다면 사람이 되돌릴 수도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이 저를 강의실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Q2. 1977년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할 때, 왜 하필 나무였습니까. 학자에게는 논문 쪽이 익숙했을 텐데요?
시골 여성들이 저를 찾아와 한 말은 단순했습니다. 땔감이 없다, 물이 멀어졌다, 아이 먹일 것이 부족하다. 그 말들을 한꺼번에 받아내는 답이 나무였습니다.
나무는 흙을 붙잡고 물길을 되살리고 땔감을 냅니다. 심는 데 학위도 장비도 필요 없습니다. 묘목과 손과 몇 달의 인내면 됩니다.
여성들이 묘목을 길러 언덕을 덮었습니다. 1984년에 제가 받은 상의 사유는 생태를 둘러싼 논쟁을 대중의 나무 심기로 바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막화를 막는 일이면서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고, 저는 그 둘을 나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Q3. 1980년대에 남편이 당신을 감당할 수 없다며 이혼을 청구했고 법원이 받아들였습니다. 사적인 패배로 남았습니까?
사적인 일로만 두기 어려웠습니다. 여자가 너무 강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말이 법정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말이 통하는 나라에서는 목소리를 내는 여성 모두가 같은 말을 듣습니다.
저는 케냐 국립 여성 협회 의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무나 심을 것이지 왜 정치에 끼어드느냐는 말을 오래 들었습니다. 1997년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섰지만 정당이 제 입후보를 거둬들였습니다.
제가 틀린 적도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된 날 기자회견에서 에이즈를 두고 근거 없는 주장에 동조했고, 그것은 음모론이었습니다. 훗날 저는 제 견해를 다시 밝혔습니다.
Q4. 다니엘 아랍 모이 정권 시절 여러 차례 수감됐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다음 날, 무엇을 하셨습니까?
다시 묘목을 봤습니다. 그것이 제가 옳다고 믿는 일을 이어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구한 것은 공정한 선거와 부패 종식, 종족을 갈라 쓰는 정치의 청산이었고, 갇혔다 나왔다고 요구가 줄지는 않았습니다.
나이로비 우후루 공원 일이 오래 남았습니다. 대통령과 손잡은 회사들이 60층짜리 미디어 복합 단지를 그 공원에 세우려 했습니다. 저는 공사를 멈추라고 요구했고, 그 요구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공원은 남았습니다. 도시 한복판의 그 초록이 지금도 시민의 것이라는 사실이, 제가 치른 것들의 값입니다.
Q5. 노벨 위원회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민주주의, 평화를 한데 묶어 당신을 호명했습니다. 나무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한 줄에 놓입니까?
땅을 함부로 쓰는 사람과 사람을 함부로 쓰는 사람은 대개 같습니다. 숲이 사라지는 곳을 따라가면 그 결정을 누가 내렸는지 드러납니다. 누가 물었고 누가 답했으며, 누구에게는 묻지 않았는지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 심기를 나라 살림의 문제로 봤습니다. 2003년에 마진기라 녹색당을 만들었고, 환경과 천연자원, 야생동물을 맡은 차관으로 일했습니다. 삽을 든 손과 법을 만드는 손은 한 몸이어야 합니다.
평화도 같습니다. 물과 땔감과 흙이 줄어들면 사람은 다툽니다. 나무를 심는 일은 다툴 이유를 줄이는 일입니다.
Q6. 2025년에는 기후 대응을 내건 기업 광고가 넘칩니다. 심은 나무를 세어 발표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런 풍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세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저희도 셌습니다. 그러나 심은 그루와 살아남은 그루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해 줍니다.
땅 주인이 누구인지 묻지 않은 나무 심기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이 나무에서 얻는 것이 있어야 나무가 삽니다. 홍보 문구에는 그 부분이 잘 적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헐벗은 언덕이 다시 덮이는 것을 저는 제 눈으로 봤습니다. 늦었다는 말이 소용없다는 말과 같지는 않습니다.
Q7. 당신이 떠난 다음에도 사람들이 계속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무엇을 이어받기를 바라십니까?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 자기가 사는 곳에 나무 한 그루를 심고, 몇 해 지나 그것이 살아 있는지 보러 가는 습관 하나면 됩니다. 심는 데는 한 시간이 들고, 지키는 데는 평생이 듭니다.
제가 가진 것은 학위와 삽이었습니다. 둘을 따로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리무루의 여학교로 걸어가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심은 묘목 하나가 지금 어느 언덕에서 그늘을 만들고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왕가리 마타이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