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필 공장 아들로 태어난 사내가 하버드 졸업장에 붙은 5달러를 끝내 내지 않았다. 양가죽은 양에게 두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는 콩코드의 숲으로 들어가 손수 오두막을 지었고, 2년 2개월을 그곳에서 살며 장부를 적듯 생활을 기록했다. 그 기록이 1854년의 《월든》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1817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1862년 같은 마을에서 마흔넷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버드를 마친 뒤 가업인 연필 제조, 교사, 측량 일을 오갔으나 어느 직업에도 오래 매이지 않았다. 랠프 월도 에머슨과 가까이 지내며 초월주의의 한 축을 이뤘고, 자연 관찰과 철학을 엮은 글로 훗날의 생태학과 환경사에 앞선 시선을 남겼다.
인두세 납부를 거부해 갇힌 경험은 1849년 〈시민 불복종〉이 됐고, 그 글은 톨스토이와 간디, 마틴 루서 킹에게 건너갔다. 그가 남긴 책과 일기, 시는 스무 권이 넘는다.
Q1. 1837년 콩코드 공립학교 교사가 되셨다가 몇 주 만에 그만두셨습니다. 체벌을 시키는 지시 때문이었다고요?
매를 들라는 요구를 받았고, 저는 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몇 주를 버티다 사직서를 냈지요. 스물의 청년에게 봉급이 아쉽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를 때리는 손으로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이듬해 형 존과 함께 콩코드 아카데미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교실에 아이들을 가둬두지 않았습니다. 숲으로 데리고 나가 걸었고, 마을 상점과 작업장을 찾아가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만드는지 보게 했습니다. 세상을 책으로만 배우면 세상을 가볍게 여기게 되더군요.
그 학교는 1842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형이 면도하다 벤 상처로 파상풍에 걸려 제 팔 안에서 숨을 거뒀거든요. 그 뒤로 저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의 오만을 덜 믿게 됐습니다.
Q2. 《월든》의 첫 장은 '경제'입니다. 오두막 살림을 셈으로 적으셨는데, 왜 시가 아니라 장부의 형식을 택하셨습니까?
사람들이 자유를 값으로 사고팔면서도 그 값을 계산해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을 얻으려고 반평생을 일하고, 그 반평생 동안 집에 있지 못합니다. 저는 못 몇 개와 판자 몇 장, 콩밭 한 뙈기의 수지를 적어 그 거래가 남는 장사인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갈라놓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옷 한 벌, 끼니 한 그릇, 지붕 한 채. 여기까지가 목숨을 연결하는 몫이고, 그 너머는 대개 남의 눈에 지불하는 비용이더군요.
후대에서는 저를 미니멀리즘의 앞선 사례로 읽습니다. 저는 셈을 해보자고 했을 뿐입니다.
숲에서 저는 호수의 수온을 재고 얼음이 얼고 녹는 날짜를 적었습니다. 새의 도착과 꽃의 개화도 날짜와 함께 남겼지요. 살림의 장부와 자연의 장부는 같은 공책에 있었습니다.
Q3. 자비로 낸 첫 책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은 1849년에 나왔지만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 실패는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세상이 제 글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종이 더미로 확인했습니다. 팔리지 않은 책이 제 방에 돌아와 쌓였지요. 형과 함께한 강 여행을 정리한 글이었으니, 그 실패는 제 애도까지 함께 되돌려받는 일이었습니다.
비판도 받았습니다. 숲에 산다면서 마을에 저녁을 얻어먹으러 내려온다, 어머니가 빨래를 해준다는 말도 돌았지요. 틀린 지적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세상을 등지려고 숲에 간 게 없었고, 마을에서 3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 실험은 관찰이었습니다.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평도 따라다녔습니다. 연필을 만들다 측량을 하고 교사였다가 글을 썼으니 그럴 만합니다. 저는 하나의 직업에 삶을 맞추는 대신 삶에 일을 맞췄고, 그 대가로 가난과 의심을 받았습니다.
Q4. 인두세를 내지 않아 하룻밤 갇히셨습니다. 노예제와 멕시코 전쟁에 세금이 쓰이는 것을 거부하신 일인데, 감옥에서의 시간은 어떠셨는지요?
벽이 저를 가뒀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제 몸은 가둘 수 있어도 제가 무엇에 동의하는지는 가둘 수 없더군요. 다음 날 누군가 대신 세금을 내어 저는 풀려났고, 그 점이 오래 불편했습니다.
그 하룻밤을 1849년 〈시민 불복종〉으로 적었습니다. 불의한 법을 지키는 손도 그 불의에 참여한다는 이야기였지요. 저는 평생 노예제 폐지를 지지했고, 도망노예법을 공격하는 강연을 했으며, 존 브라운을 옹호했습니다. 온건한 방식만 옳다고 말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제 글이 훗날 인도와 미국에서 다른 이들의 손에 들렸다는 이야기를 저는 알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물러서지 않는 일에는 그만한 값이 있는 모양입니다.
Q5. 호수의 결빙일과 꽃 피는 날짜를 해마다 적으셨습니다. 그런 관찰 기록이 오늘 지구를 읽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공책이 후대에 쓰이리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같은 장소를 같은 눈으로 여러 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한 해의 관찰은 이야기가 되지 않지만, 스무 해가 쌓이면 그 땅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땅을 측량하는 일로 밥을 벌었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경계를 재는 사람은 땅이 나뉘고 팔리고 베어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봅니다. 콩코드의 숲이 장작과 목재로 잘려 나가는 것을 저는 해마다 봤습니다.
낭비와 환상을 버리고 삶에 정말 필요한 것을 찾자고 했습니다. 무엇을 태우고 무엇을 베는지 세어보면 그것이 살림의 계산으로 돌아옵니다.
Q6. 2025년의 사람들은 기후와 자원 문제를 두고 절망과 낙관 사이를 오갑니다. 어느 쪽에 서시겠습니까?
양쪽 다 편한 자세입니다. 다 끝났다고 말하면 오늘 할 일이 없어지고, 기술이 알아서 해준다고 말해도 오늘 할 일이 없어집니다. 두 말은 결론이 반대일 뿐 결과는 같더군요.
저라면 자기 살림의 장부부터 펴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을 사고 무엇을 버리는지, 그중 실제로 삶을 지탱하는 몫이 얼마인지. 이 셈은 남을 비난하지 않고도 할 수 있고, 오늘 저녁에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도를 향한 요구를 개인의 절제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절약하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동시에 세금을 거부하고 강연대에 올라가 법을 공격했습니다. 두 손으로 각각 하는 일입니다.
Q7. 다음 세대가 선생의 이름에서 무엇을 가져가길 바라십니까?
제 이름보다 그들 동네의 물가를 알기 바랍니다. 어느 새가 언제 오는지, 얼음이 며칠에 갈라지는지 적어두는 사람이 한 마을에 하나씩 있으면 됩니다.
저는 1862년 봄에 폐를 앓다 콩코드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창밖으로 그 마을의 나무를 봤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일생이었습니다.
사는 곳 가까운 물가나 나무 한 그루를 정해두고, 오늘 날짜와 함께 본 것을 한 줄 적어두면 된다. 소로의 공책이 그렇게 시작했다.
이 글은 실제 대담이 아닙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애와 저작,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브레스저널이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질문은 기자가 만들었고 답은 그가 남긴 글과 행적에서 끌어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