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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곁 종각에 남은 조선 왕실의 청동 소리

루츠·입력 2026. 03. 08. 오후 1:56:00
봉선사 동종 국보 예고, 보물 지정 63년 만의 승격 절차
창건 당시 봉안처를 떠난 적 없는 봉선사 동종
창건 당시 봉안처를 떠난 적 없는 봉선사 동종 / 사진 문화재청 (공공누리 제1유형) · CC BY-SA 4.0

국가유산청이 '남양주 봉선사 동종'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고시는 3월 4일 자로 나갔고, 30일의 의견 수렴 기간을 거쳐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로 넘어간다. 1963년 보물이 된 뒤 63년 만에 등급이 한 단계 올라서는 절차다. 최종 지정이 이뤄지면 남양주시가 갖는 첫 국보가 된다.

종의 내력은 한 사람의 애도에서 시작한다. 조선 제8대 임금 예종은 아버지 세조의 명복을 빌 목적으로 봉선사를 세웠고, 그 창건과 함께 이 대형 동종을 부어 걸었다. 세조의 재위는 1455년부터 1468년까지, 예종의 재위는 1468년부터 1469년까지로 전한다. 절은 세조가 잠든 광릉에서 멀지 않은 땅에 앉았다.

몸집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다. 높이는 238㎝로 기록됐고, 다른 계측에서는 약 2.3m로 적혀 있다. 입지름 168㎝, 두께 23㎝의 청동 덩어리가 종각 대들보에 매달려 육백 년 가까이 같은 그늘을 지고 있었다. 주조 균열이나 뒤틀림이 거의 없는 상태로 남았다는 점이 국보 지정 사유에 담겼다.

이 종이 특별한 까닭은 옮겨진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조선 전기 왕실이 발원한 대형 동종 가운데 제작 당시의 봉안처인 봉선사 종각에 그대로 걸려 있는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왕실 발원 범종 상당수가 전란과 폐사, 이건을 거치며 원래의 처마를 잃었던 것과 견주면 드문 일이다.

형태는 조선종의 문법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꼭대기에는 고려종에 있던 용통이 사라지고,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 고리를 이룬다. 어깨에는 두 줄, 몸통 가운데에는 세 줄의 가로 띠가 돌고, 윗부분에는 사각형 연곽과 보살입상이 번갈아 놓인다. 아래쪽 넓은 면은 긴 명문이 채운다.

조선종 형식의 요소가 종 몸통에 층으로 나뉘어 배치된다
조선종 형식의 요소가 종 몸통에 층으로 나뉘어 배치된다 / ⓒ 브레스저널

고려 종보다 넓어진 입구, 몸통을 두른 띠, 보살입상, 육자광명진언 같은 요소가 한자리에 모였다. 중국 종의 양식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종의 문양 전통을 놓지 않은 결과물로, 국가유산청은 조선 전기 동종 양식이 여기서 완성됐다고 봤다. 뒤이은 조선 종들이 이 형식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평가도 함께 나왔다.

명문은 종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붙잡아 둔 기록이기도 하다. 주종기는 강희맹(1424~1483)이 짓고 정난종(1433~1489)이 썼으며, 제작 배경과 연대, 봉안처, 참여 장인이 적혀 있다. 여기 이름을 올린 장인 가운데 일부는 흥천사명 동종과 옛 보신각 동종 제작에도 손을 보탰던 것으로 파악된다. 임진왜란 이전 왕실 범종의 계보가 사람의 손을 통해 이어졌다는 뜻이다.

같은 시기 13세기 고려 상감청자인 '청자 상감쌍룡국화문 반'과 '유효걸 초상 및 궤'도 보물 지정이 예고됐다. 유효걸(1594~1627)은 이괄(1587~1624)의 난을 진압해 진무공신 2등에 오른 인물이다. 국가유산청장 허민 명의의 예고 절차는 각계 의견을 받은 뒤 심의로 이어진다.

주광덕 남양주시장은 지역 유산을 짜임새 있게 지키고 활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보존과 활용은 종에서 특히 예민하게 부딪친다. 청동은 울릴 때 가장 종답고, 울릴수록 닳기 때문이다. 첫 국보를 눈앞에 둔 도시가 이 종을 유물로 세워둘지, 소리로 남겨둘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의견 수렴이 끝나면 심의 일정이 잡힌다. 그 전에 광릉 숲길을 걸어 봉선사 종각까지 가보길 권한다. 처마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검푸른 몸통에 돌아가는 가로 띠와 보살의 옷자락이 눈높이보다 한참 위에서 천천히 드러난다. 종각에 서면 육백 년 동안 이 종이 한 번도 옮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루츠 기자 · Breath.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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