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난을 겪은 사람을 기다렸다가 만나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국립정신건강센터는 '2026 트라우마 치유주간' 행사의 하나로 국제 학술대회를 연다고 지난 22일 밝혔다. 서울 광진구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24일까지 이어진 이 행사에서, 재난 경험자를 찾아내는 단계부터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을 디지털로 잇고 인공지능이 상태를 분석해 전문가를 연결하는 체계가 논의됐다.
학술대회는 글로벌 트라우마 스트레스 협의체(GCTS)와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KSTSS), 국립정신건강센터가 함께 마련했다. GCTS로서는 두 번째 국제 콘퍼런스로, 첫 회는 202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렸다. 참여 전문가의 출신 국가는 40여 개국으로 파악된다.
다뤄진 주제는 넓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의 확산, 군 트라우마, 전쟁과 난민·분쟁 지역의 정신건강, 아동과 가족의 트라우마,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상처, 성폭력 관련 외상, 그리고 기후 위기와 정신건강까지 놓였다. 재난이 한 사람의 삶에 남기는 흔적이 얼마나 여러 갈래인지가 프로그램 목록에 그대로 드러났다.
24일 열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재난 정신건강 관리' 심포지엄이 이번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오승훈 책임연구원은 재난 경험자 발굴, 평가, 상담, 사후관리에 이르는 과정을 디지털화하고 AI가 상태를 분석해 전문가를 자동으로 매칭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시스템은 음성과 텍스트를 바탕으로 우울·불안·외상 후 스트레스(PTSD) 수준을 수치로 환산하고, 변화를 따라가는 기능을 넣어 오랜 기간 상태를 지켜볼 수 있게 했다.
재난 직후 몇 주가 지나면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줄어든다. 상처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말할 힘이 남지 않아서다. 상태를 계속 기록하고 변화를 감지하는 기술은 그 침묵의 구간을 메우는 쪽으로 설계됐다.

석정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회장은 다른 접근을 내놓았다. 타액 코티졸과 심박변이도(HRV) 같은 생체지표에 우울·불안·PTSD 설문을 결합한 평가와 맞춤형 개입 프로토콜이다. 급성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과 번아웃 중심의 만성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을 나눠 다르게 개입하고, VR 기반 심리 안정 콘텐츠와 교육 프로그램처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기술이 넓히는 것만 이야기된 것은 아니다. 한국트라우마교육연구원 이나빈 연구원은 비대면 상담에 개인정보 유출과 보안 취약성, 위기 상황 대응 지연이라는 위험이 따른다고 짚었다. 상담자의 기술적 역량, 사전 동의 절차, 방해받지 않는 독립된 상담 환경, 비상 연락체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는 조건도 덧붙였다. 화면 너머의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면, 연결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이 쌓아온 경험도 국제 사회에 전해진다. 채정호 가톨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심민영 전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이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의 재난 정신건강 대응과 체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공유할 예정이다. 이형훈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22일 개회식에서 한국의 재난 정신건강 경험을 나누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체계를 마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제갈등과 관련한 트라우마 관리를 다룬 세션도 함께 진행됐다.
기술은 상태를 읽어낼 뿐, 회복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다시 사람을 만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는 일이 이번 논의의 실질적인 목표에 가깝다. 광진구 강당에서 오간 발표들은 실증과 제도의 문턱을 넘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고, 구체적인 시행 계획은 확정되지 않았다. 그래도 재난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 문을 두드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는 전제 하나는 이번에 분명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