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규제는 대기업에, 청구서는 협력업체에

플래닛·입력 2026. 03. 07. 오전 10:37:00
탄소 데이터 인프라 없는 중소기업이 수출 규제 부담을 떠안는다
공급망 각 단계의 배출량이 제품 하나의 내재배출량으로 합산된다
공급망 각 단계의 배출량이 제품 하나의 내재배출량으로 합산된다 / ⓒ 브레스저널

지방 산업단지의 40인 규모 도금업체에 원청의 요청서가 도착한다. 지난달 납품한 부품의 공정별 전력 사용량과 배출계수를 항목별로 적어 보내라는 내용이다. 이 회사에는 계량기 데이터를 공정 단위로 쪼갤 시스템이 없고, 그 일을 전담할 인력도 없다. 요청서에 적힌 마감일은 원청의 공시 일정에서 역산돼 있다.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수입품에 내재된 배출량을 신고하도록 요구한다. 유럽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은 공급망 배출을 포함한 보고를 의무화했고, 캘리포니아의 기후공시 규정 역시 대기업에 유사한 산정을 요구한다. 세 제도의 공통점은 배출량 산정의 경계가 보고 주체의 담장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스코프3는 협력업체의 스코프1과 2를 합산한 값이다.

그래서 이 글의 주장은 하나다. 지금의 지원 설계는 규제 대상과 부담 주체를 혼동하고 있다. 법적 의무를 지는 쪽은 공시 기업이지만, 실제로 새로운 측정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쪽은 그 아래 수십 개 층의 납품업체다. 예산이 공시 대응 컨설팅과 보고서 작성에 집중되는 동안, 데이터를 생산할 설비와 인력에는 돈이 닿지 않는다.

반대 논리도 분명하다. 지원 재원은 유한하므로 수출 비중이 크고 파급력이 큰 대기업부터 대응 역량을 갖추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대기업이 체계를 세우면 그 방법론이 협력업체로 내려간다는 기대도 있다.

타당한 설명이지만 한 가지를 빠뜨린다. 방법론은 내려가도 계량기와 인건비는 내려가지 않는다.

공시 의무는 위에 있고 측정 부담은 아래로 이동한다
공시 의무는 위에 있고 측정 부담은 아래로 이동한다 / ⓒ 브레스저널

내려가는 것은 요청서다. 원청이 산정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수록 협력업체에 요구되는 데이터 항목은 늘어난다. 스코프3 산정 범위를 넓힌 기업의 배출량 집계치가 전년 대비 크게 뛰는 현상이 그 증거다.

배출량 자체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세지 않던 협력업체의 배출이 장부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담의 성격도 다르다. 대기업에 이것은 보고 비용이지만, 협력업체에는 거래 지속 조건이다. 데이터를 제출하지 못하는 업체는 벌금을 무는 대신 공급망에서 빠진다. 규제가 직접 닿지 않는 곳에서 규제의 효과가 가장 날카롭게 작동하는 이유다.

제도 자체를 되돌리자는 말은 아니다. 배출량을 측정하고 공개하는 일은 국제 무역의 전제로 굳어지고 있다. 논점은 측정 비용을 누가 감당하느냐다. 계량 설비 설치, 공정별 데이터 수집 시스템, 이를 다룰 사람에 대한 지원이 공시 컨설팅과 같은 비중으로 다뤄지지 않는다면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지켜볼 지점은 지원 사업의 항목별 배분이다. 컨설팅과 보고서 작성에 얼마가 배정되고, 측정 설비와 인력에 얼마가 배정되는지 비율만 확인해도 정책이 어디에 힘을 싣고 있는지 드러난다. 규제 시행일은 기업 규모에 따라 유예되지만, 요청서가 도착하는 시점은 유예되지 않는다. 산업단지의 40인 업체는 이달 마감일을 받아 든 상태다.

플래닛 기자 · Breath.E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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