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망분리 13년, 규제의 축이 옮겨간다

미디어·입력 2026. 02. 12. 오후 8:45:00
차단 대신 기록으로, 금융·콘텐츠 규제가 같은 길로 모인다
차단하던 벽이 사라진 자리에 기록의 선이 깔린다
차단하던 벽이 사라진 자리에 기록의 선이 깔린다 / ⓒ 브레스저널

금융위원회가 시중은행의 생성형 AI 활용을 가로막는 금융 규제 전반을 재검토하고 있다. 디지털금융정책관이 주도하는 이번 검토의 핵심은 13년간 유지돼 온 '물리적 망분리' 원칙을 '논리적 망분리'로 바꾸는 문제다. 물리적 망분리는 인터넷망과 업무망을 아예 다른 선으로 깔아 놓는 방식이고, 논리적 망분리는 한 선을 쓰되 소프트웨어로 데이터와 권한을 나누는 방식이다. 검토는 내부 단계에 머물러 있고 시행 시점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 변화의 실물은 현장에 나와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21일 국가정보원의 다층보안체계를 적용해 업무 데이터를 기밀·민감·공개 3개 등급으로 나눴다. 그리고 공개 등급 데이터에 한해 내부망에서 AI를 쓸 수 있게 했다. 모든 데이터를 똑같이 막는 대신, 등급별로 다르게 다루는 쪽으로 원칙을 튼 것이다.

구성 요소는 네 가지다. 데이터마다 등급 꼬리표를 붙이고, 등급별로 접근 권한을 나누고, 외부 AI 서비스를 부르는 통로를 통제하고, 누가 무엇을 했는지 행위 로그를 전면 기록한다. 앞의 세 가지가 '어디까지 허용할지'를 정한다면, 마지막 하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되짚을 수 있게' 만든다. 이 네 번째 요소가 이번 흐름의 핵심이다.

은행들이 왜 이 변화를 기다렸는지는 그동안의 절차를 보면 드러난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주요 시중은행은 마이크로소프트 365, 챗GPT, 슬랙을 내부망에서 쓰기 위해 규제 샌드박스, 즉 혁신금융서비스 지정을 반복해서 신청해왔다. 일반 직장에서는 별다른 승인 없이 쓰는 도구를, 은행 직원은 건건이 예외 허가를 받아야 썼다는 뜻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기존 '금융 AI 가이드라인'을 손보고 데이터 활용 규제를 완화할 필요성도 함께 살피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원리가 전혀 다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EU는 AI가 만든 콘텐츠의 표시와 투명성을 다루는 준수 강령 최종안을 6월에 내놓을 예정이다. 발표 주체와 구속력의 범위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겨냥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AI 사용 자체를 금지하는 대신 사용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하는 쪽이다.

산업계 자율 규범도 같은 결론에 앞서 도달해 있었다. 넷플릭스는 지난해 8월 제작 지침에서 생성형 AI를 창작 보조 수단으로 인정하되, 저작권을 침해하지 말 것, 입력한 데이터가 모델 학습에 재사용되지 않게 할 것, 창작자 권리를 존중할 것을 파트너 제작사에 요구했다. 쓴 흔적을 남기라는 지침이다.

국내에서는 지난달 22일 'AI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 시행됐다. 법에는 계도 기간이 설정돼 있어 당장 제재가 작동하지는 않는다. 한국 규제가 다른 지역보다 무거운지 가벼운지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갈린다. 완화 쪽으로 움직인다는 해석과, 기본법을 앞당겨 시행해 부담을 지웠다는 해석이 함께 나온다.

기술 공급 쪽도 이 조건에 맞춰 움직인다. AI 솔루션 기업 슬렉슨은 3월 4~6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AW 2026에 참가해 온프레미스 기반 AI-네이티브 R&D 플랫폼을 선보인다. 온프레미스는 외부 클라우드 대신 회사 내부 서버에 시스템을 두는 방식이다. LLM 인프라인 Puteron AI, 코딩 도구 CodeCenter, 이력 관리 도구 Trace.Space를 붙여 놓은 구성으로, 보안과 네트워크 제약 때문에 AI 도입이 미뤄져온 기업 R&D 현장을 겨냥한다.

남은 과제도 뚜렷하다. 로그를 남기는 일과 그 로그를 실제로 들여다보는 일은 다르다. 데이터 등급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매길지, 잘못 매겨졌을 때 누가 책임지는지는 설계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정원 체계를 민간 금융권이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지도 정리해야 할 사안이다.

은행 창구 직원이 대출 서류를 검토하며 AI에 뭔가를 물어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지금은 그렇게 물어보기까지 예외 승인이 필요하다. 규제의 축이 옮겨간 뒤에는 곧바로 물어볼 수 있고, 대신 그 문답이 어느 등급의 데이터를 건드렸는지가 조용히 기록된다. 3월 코엑스의 시연대와 6월 EU의 강령 발표는 그 기록의 문법이 어디까지 합의됐는지 보여주는 두 번의 확인 지점이 될 것이다.

미디어 기자 · Breath.T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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