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안전을 어떻게 다룰지를 두고 벌어지던 논쟁이 선거판으로 옮겨붙었다. 앤트로픽은 12일(현지시간) 규제 강화를 요구하는 슈퍼팩 '퍼블릭퍼스트액션'에 2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287억원가량을 내놓았다고 공개했다. 슈퍼팩은 미국에서 후보 캠프와 별도로 무제한 모금·지출이 가능한 정치자금 조직을 뜻한다. 같은 기술을 만드는 회사들이 이제 규제의 방향을 두고 광고비로 맞서는 국면이다.
퍼블릭퍼스트액션이 내건 요구는 네 갈래다. AI 모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외부에 설명하도록 하는 투명성 의무, 연방 차원의 강한 규제 입법, AI용 반도체의 수출 통제, 그리고 AI를 이용한 생물학무기·사이버공격에 대한 규제다. 연방 규제를 강하게 요구하면서도 주 정부가 각자 만든 규제를 무력화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점이 이 조직의 특징이다. AI 규제에 찬성하는 공화당·민주당 인사들이 함께 세웠다.
맞은편에는 오픈AI와 벤처투자사 앤드리슨 호로비츠(a16z)가 주축이 된 '리딩더퓨처'가 있다. 이쪽 주장은 규제 권한을 연방으로 모으고 주 정부의 개별 입법은 막자는 것이다. 그레그 브록먼 오픈AI 사장 부부, 마크 앤드리슨과 벤 호로위츠가 각각 1천250만 달러를 냈다. 누적 모금액은 1억2천500만 달러(약 1천800억원)로 전해지는데, 집계 시점을 명시한 공식 공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퍼블릭퍼스트액션의 목표 모금액은 5천만~7천500만 달러, 720억~1천80억원 수준이다. 이미 광고도 돌고 있다. 아동 온라인 안전 법안을 밀어온 마샤 블랙번 테네시주 주지사 후보, AI 칩의 대중국 수출 제한 법안을 낸 피트 리키츠 상원의원(공화·네브라스카)이 지원 대상이다. 광고 집행 규모와 후보 명단 전체는 확정되지 않았다.
앤트로픽이 이 시점에 지갑을 연 배경에는 회사의 몸집 변화가 있다. 같은 날 앤트로픽은 시리즈G 라운드를 마감하며 300억 달러(약 43조원)를 확보했다고 알렸다. 처음 잡은 목표는 100억 달러였고 지난달 말 200억 달러로 올렸는데, 결과는 그마저 크게 넘겼다. 기업가치는 3천800억 달러, 원화로 545조원으로 매겨졌다.
돈을 댄 명단에는 GIC와 코투가 라운드를 이끌었고 세쿼이아캐피털, 카타르투자청, 그리고 블랙록·블랙스톤·피델리티·골드만삭스·JP모건체이스·모건스탠리 같은 전통 금융기관이 이름을 올렸다. 회사는 연환산 매출이 2024년 1월 1억 달러에서 2025년 1월 10억 달러, 올해 1월 140억 달러(약 20조원)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자체 발표 수치이며 산정 기준은 회사 밖에서 검증된 바 없다. 오픈AI의 기업가치는 5천억 달러 안팎으로 거론된다.
규제 강화를 외치는 쪽이 동시에 조 단위 투자를 받고 있다는 점은 이 대결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읽기 어렵게 만든다. 앤트로픽은 위험을 통제하면서 미국이 AI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유연한 규제가 필요하다며,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구경만 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회사 블로그에는 특정 기업을 짚지 않은 채 AI 안전 노력에 반대하는 정치 조직으로 막대한 자원이 흘러들고 있다는 문장이 담긴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데이비드 색스 백악관 AI 책임자는 앤트로픽이 스타트업 생태계를 해치는 규제 열풍을 부추긴다고 공개 비판한 바 있다.
주 정부 규제를 살릴 것이냐 없앨 것이냐는 미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은 AI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고위험 영역 판정과 투명성 의무의 범위를 다듬는 중인데, 미국에서 어느 쪽 논리가 표를 얻느냐에 따라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 규제에 응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11월 중간선거까지 아홉 달 가까이 남았고, 두 슈퍼팩의 광고비는 그때까지 계속 쌓인다.
일상에서 이 싸움의 결과는 조용하게 드러난다. 챗봇이 어떤 데이터로 학습했는지 물었을 때 답을 받을 수 있는지, 의료·채용처럼 삶을 좌우하는 판단에 AI가 끼어들 때 근거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지가 여기서 갈린다. 지금은 그 규칙을 기술자들이 아니라 선거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이 다듬고 있다. 어느 진영이 이기든, 규칙이 만들어지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