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저널 The Breath Journal

『랩 걸』, 나무 곁에서 버틴 실험실의 기록

배진경·입력 2026. 04. 25. 오후 4:15:00
식목일과 지구의 날 사이, 연구라는 노동을 다시 읽는다
『랩 걸』이 바라보는 것은 나무와 그 곁의 오랜 노동이다
『랩 걸』이 바라보는 것은 나무와 그 곁의 오랜 노동이다 / 사진 Tawhid Sadman · CC0

씨앗 하나가 싹을 틔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온도, 물, 빛, 그리고 기다림이다. 나무를 연구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한 계절의 관측으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몇 해를 이어 붙여야 겨우 한 문장이 나온다.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 2017)은 그 기다림의 시간을 기록한 책이다. 식물을 연구해 온 과학자가 자신이 통과한 실험실의 나날을 쓴 회고록이다. 나무와 씨앗과 뿌리가 한 축이고, 그것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당한 노동이 다른 한 축이다.

과학 교양서를 펼치는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대개 결론이다. 어떤 발견이 있었고 그것이 무엇을 바꾸었는가. 이 책은 그 앞의 긴 과정을 보여 준다. 장비를 마련하고, 예산을 걱정하고, 밤을 새우고, 다시 표본을 들여다보는 일의 반복이다.

기후 지면이 관심을 갖는 지점이 여기서 나온다. 탄소중립을 말할 때 근거로 삼는 수치들은 모두 이런 시간의 산물이다. 숲이 탄소를 얼마나 붙들어 두는지, 나무가 얼마나 빨리 자라며 기후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누군가가 십수 년을 붙어 앉아 재고 기록해야 알 수 있다. 데이터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랩 걸 · 호프 자런 · 알마
랩 걸 · 호프 자런 · 알마 / 표지 · 알마

그래서 이 책은 뜻밖의 문제를 꺼낸다. 연구 현장 자체는 지속 가능한가. 기후 위기를 다루는 지식이 계속 생산되려면 그 지식을 만드는 사람의 생활이 버텨 줘야 한다. 나무를 심는 일과 나무를 연구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책의 힘은 과학과 삶을 억지로 봉합하지 않는 데 있다. 식물의 생애를 설명하는 문단과 자신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단이 번갈아 이어지며 서로를 비춘다. 자연을 소재로 감상만 늘어놓는 에세이와도, 사실만 나열하는 개론서와도 결이 다르다.

얇아지는 부분도 있다. 이 책은 정책서가 아니다. 탄소 예산이나 자원순환의 제도 설계를 기대하고 펼치면 얻을 것이 적다. 개인의 경험을 통과한 서술이므로 한 사람의 궤적으로 모든 연구 현장의 사정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이테 한 겹이 곧 한 해치의 관측 기록이다
나이테 한 겹이 곧 한 해치의 관측 기록이다 / ⓒ 브레스저널

그럼에도 이 책이 남기는 것은 태도다. 위기를 과장해 겁을 주지도,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는 사실로 모든 것을 덮지도 않는다. 오래 들여다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거기에 있다.

기록이라는 말이 이 책에서는 성실함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다. 잎이 언제 돋았는지 적어 두는 손, 같은 나무 앞으로 해마다 돌아오는 걸음은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런 축적이 쌓여야 비로소 보이는 변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에 나무의 생애를 따라가는 일은 어떤 쓸모를 갖는가.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동안, 천천히 자라는 것들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무엇을 지켜 낸 것인가.

배진경 기자 · Breath.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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