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람의 집 앞에서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어 주는 일, 약봉지를 확인하는 일, 어제보다 얼굴빛이 어떤지 살피는 일. 통합돌봄이라는 이름의 제도가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그 현관 앞 몇 분이다. 설계도가 아무리 정교해도 그 몇 분을 채울 사람이 없으면 제도는 문 밖에 머문다.
올해 통합돌봄이 전면 시행에 들어간다. 시행을 앞두고 지자체마다 돌봄 인력을 길러 내겠다는 협약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교육기관과 손을 잡고, 양성 과정을 열고, 수료 인원을 목표로 내건다.
협약이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소식이다. 동시에 다른 것도 말해 준다. 지금 현장에 사람이 모자란다는 사실이다.
이 글의 주장은 하나다. 통합돌봄의 성패는 제도 설계가 아니라 돌볼 사람이 남아 있느냐에 달렸다. 사람을 새로 뽑는 문제가 아닌, 뽑은 사람이 남아 있게 하는 문제다. 양성과 유지는 다른 일이고, 협약으로 해결되는 쪽은 앞의 절반뿐이다.
반론은 분명하다.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 인력은 따라온다는 것. 안정된 체계가 생기면 일자리의 질도 오르고, 사람도 모인다는 논리다.
순서로 보면 틀리지 않다. 다만 그 순서가 성립하려면 제도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버텨 줄 사람이 지금 현장에 있어야 한다.
돌봄은 대체하기 어려운 노동이다. 한 사람이 그만두면 그가 알던 것도 함께 빠져나간다. 어느 집 계단이 미끄러운지, 누가 약을 자꾸 거르는지, 어떤 말투로 물어야 대답이 돌아오는지. 신규 인력 한 명은 숫자로는 채워지지만 그 정보까지 채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협약을 읽을 때 확인할 것은 수료 인원이 아니다. 그 다음 줄이다. 양성한 사람이 어디로 배치되고, 얼마를 받고, 몇 년을 일하는지. 이 대목이 비어 있는 협약은 입구만 넓히고 출구는 그대로 두는 이야기다.
돌봄을 받는 사람도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자기 집에서 계속 살겠다는 결정을 내린 사람이고, 그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사람이다. 제도는 그 조건을 만들어 주는 쪽이지, 결정을 대신해 주는 쪽이 아니다.
전면 시행 첫해에 지켜볼 지표는 몇 명을 길렀는가가 아닌 몇 명이 남았는가다. 협약이 쏟아지는 지금은 그 질문을 협약문에 넣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문서가 많다는 것, 그것이 이 시점에 남아 있는 여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