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일곱 시 반, 아파트 현관에서 아이를 받아 안는 노인이 있다. 아이 부모는 출근하고, 노인의 하루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저녁에 아이를 돌려보내고 나면 무릎에 파스를 붙인다. 이 장면은 흔해서 아무도 사건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안에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의 절반가량은 자신이 원해서 그 역할을 맡은 게 아니라고 답한다. 달리 맡길 데가 없어 떠안았다는 뜻이다. 좋아서 한다는 대답과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대답이 거의 반반으로 갈린다.
가정 안에서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돌봄은 사실 해결된 것이 아니다. 국가가 치렀어야 할 비용을 노년의 몸이 대신 감당했을 뿐이다. 이 계산서는 어느 통계에도 항목으로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의 주장은 하나다. 어버이날에 맞춰 쏟아지는 돌봄 공약은 조부모에게 무엇을 더 주느냐로 평가할 일이 아니다. 조부모에게서 무엇을 덜 가져가느냐로 따져야 한다.
통합돌봄과 영유아 돌봄 확충의 성패도 이용률로는 잡히지 않는다. 새벽에 아이를 받으러 나가지 않아도 되는 노인이 몇 명 늘었는지로 재는 편이 정확하다.
반론은 강하다. 조부모 돌봄은 가장 믿을 만한 돌봄이고, 많은 노인이 손자녀와 보내는 시간을 삶의 보람으로 여긴다. 사실이다. 기관에 맡기는 것보다 안심된다는 부모들의 말도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니다.
그러나 보람과 강요는 겉모습이 같다. 둘 다 아침마다 현관에 서 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차이는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느냐 하나뿐이다.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나온 헌신을 미담으로 읽으면, 정책은 아무것도 고칠 필요가 없어진다.
돌봄 정책을 설계할 때 확인할 것도 여기서 갈린다. 등하원 시간대가 실제 출퇴근 시간과 맞물리는지, 아이가 열이 났을 때 대신 갈 사람이 기관에 있는지, 주말과 방학에 서비스가 끊기지 않는지. 이 세 곳이 비어 있는 한 그 틈은 언제나 조부모의 하루로 메워진다.
선물과 카네이션은 하루면 끝난다. 조부모가 되돌려받아야 하는 것은 병원에 갈 오전, 친구를 만날 오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저녁이다. 어버이날에 나온 약속들이 내년 이맘때 무엇을 바꿔놓았는지는, 그 현관에 누가 서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