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의 회계·공시 담당자에게 지속가능성 공시를 언제부터 준비하면 되느냐고 물으면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시작 연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로드맵 최종안은 상반기 발표를 목표로 당정 조율 단계에 머물러 있고, 상반기가 끝나기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보름 정도다. 준비 기간을 준다는 명목의 연기가 준비를 멈춰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연기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례가 유럽이다. 유럽연합은 지속가능성 공시에서 기업이 채워야 하던 의무 데이터 항목을 60% 이상 덜어냈다. 국내에서 이 조정은 규제 후퇴의 신호로 인용되고, 기업 수용성이라는 표현과 묶여 일정을 뒤로 미루는 근거로 쓰인다. 국제 기준이 물러서는데 국내만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요구 항목을 줄이는 일과 시행 시점을 비워두는 일은 성격이 다르다. 유럽이 손본 것은 무엇을 얼마나 내느냐의 범위였고, 국내에서 미뤄지는 것은 언제부터 내느냐다. 범위는 제도가 작동하는 동안에도 조정할 수 있지만, 시점이 없으면 제도는 시작되지 않는다. 남의 후퇴를 빌려 오는 대신 확정 가능한 시점부터 못 박는 편이 기업 부담을 실제로 낮춘다.
기업 수용성 주장에 근거가 없지는 않다. 배출량 데이터를 모으는 인력과 시스템, 검증 체계를 갖추는 비용은 규모가 작을수록 무겁게 걸린다. 국제 논의가 흔들리는 국면에서 국내 기준을 앞서 확정하면 두 번 일하게 된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부담이 실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반박하기 어렵다.
그런데 시점이 비어 있을 때 그 비용은 사라지지 않고 뒤로 이동한다. 시행 연도가 없으면 예산 편성도, 담당 인력 배치도, 데이터 수집 시스템 발주도 다음 회계연도로 넘어간다. 결국 짧은 기간에 몰아서 대응하는 방식이 남고, 압축 대응은 외부 자문과 외주 단가를 끌어올린다. 수용성을 높이는 가장 값싼 수단은 예측 가능성이다.
비용의 반대편에는 비교 가능성이 있다. 같은 업종의 기업들이 서로 다른 기준으로, 서로 다른 해에 자료를 내놓으면 투자자도 협력업체도 대조할 대상을 갖지 못한다. 유럽이 요구 항목을 줄였어도 공급망을 따라 내려오는 데이터 요청이 함께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 기준이 비어 있으면 그 요청에 응하는 비용은 개별 기업이 각자 떠안는다.
전부를 한 번에 정할 필요는 없다. 적용 대상의 규모별 시행 연도, 초기 몇 년간의 책임 완화 범위, 제3자 검증 도입 시기는 성격이 달라 따로 확정할 수 있다. 국제 기준이 더 바뀐다면 항목은 그때 덜어내면 된다. 시행 시점부터 확정하고 적용 범위를 나중에 손보는 편이, 범위 논의를 이유로 시점을 미루는 편보다 기업에 유리하다.
상반기 안에 최종안이 나온다면 읽어야 할 곳은 항목 개수가 아니다. 어느 규모의 기업이 몇 년도부터 무엇을 내는지, 그 한 줄이 적혀 있는지를 보면 된다. 조율이 길어질수록 확정의 효용은 줄고, 유예의 명분은 다음 해에도 그대로 재사용된다. 그 한 줄이 비어 있는 채 발표된다면, 이번 발표도 연기의 다른 이름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