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백색으로 바랜 나무 상판 위에 종이가 흩어져 있다. 손으로 뜬 두꺼운 종이, 봉랍 도장, 뚜껑 열린 잉크병 두 개, 결이 살아 있는 크라프트 봉투. 창에서 들어온 겨울 빛이 왼쪽 어깨 쪽으로 비스듬히 떨어지고, 오른손은 나무 펜대를 쥔 채 갈색 카드 위에 첫 글자를 막 얹었다.
왼손은 종이가 밀리지 않게 눌러 두었다. 이런 자세에서는 어깨가 저절로 낮아지고, 숨이 짧게 멈췄다가 획이 끝나는 지점에서 풀린다. 눈의 초점은 손끝에서 손가락 두 마디쯤 떨어진 곳, 잉크가 덜 마른 획 위에 머문다.
말이 되지 못한 채 목 근처에 걸려 있는 문장이 있다. 누구에게 전할지 정하지 못해 오래 데리고 다닌 그런 말.
종이 한 장을 꺼내 그 문장을 한 줄만 적어 봐도 된다. 봉투에 넣지 않아도, 주소를 쓰지 않아도 된다. 다 쓴 뒤 잉크가 마르는 동안 손을 무릎에 내려놓고 기다려 보면 어떨까.
같은 일은 서랍을 여닫는 잠깐에도 놓아둘 수 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물기를 닦은 손으로 식탁에 앉아, 마른 획 위에 다시 한 줄을 얹어 보게 된다. 그때 펜대를 쥔 손가락에 얼마나 힘이 들어가 있는지, 엄지와 검지의 마디가 하얗게 되는지 눈으로 확인해 볼 만하다. 느슨해지는 지점이 어디쯤인지도 그저 지켜본다.
책상 위에는 부치지 않은 종이들이 조용히 쌓여 있고, 겨울 빛은 그것들을 재촉하지 않는다.
배진경 기자 · Breath.Soci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