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 이사회와 유럽의회가 7일(현지시간) AI법(AI Act)의 일부 조항을 간소화하고 유연하게 바꾸는 잠정 합의에 이르렀다고 공동 발표했다. 생체 식별, 중요 인프라, 법 집행 등에 쓰이는 고위험 AI 시스템에 대한 규제 시행 시점은 2027년 12월로 미뤄졌다. 같은 주 한국 국회는 5월 7일 본회의에서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산업 진흥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을 의결했다. 대륙은 다르지만 두 결정이 가리키는 곳은 같다.
EU AI법은 2024년 발효된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기본법으로 파악된다. 고위험 AI란 사람의 신체·권리·생계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에 쓰이는 시스템을 말한다. 얼굴로 신원을 가려내는 시스템, 전력망이나 교통망을 제어하는 시스템, 수사기관이 쓰는 시스템이 여기 들어간다. 이런 분야에 위험관리·문서화·인적 감독 의무를 물리려던 일정이 뒤로 밀렸다.
완화의 폭은 시점 조정에 그치지 않는다. 별도의 산업 안전 규제를 받고 있는 기계·산업장비는 AI법 적용 범위에서 상당 부분 빠진다. 독일과 프랑스 제조업계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다. 미스트랄AI, ASML, 지멘스, SAP, 에릭슨 등 유럽 IT기업 최고경영자들이 공동 성명으로 규제 완화를 요구해온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반대로 조인 부분도 있다. 동의 없이 성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른바 '누디파이어' 도구는 금지되고, AI 기반 아동 성착취물 생성도 전면 금지된다. AI가 만든 콘텐츠에 워터마크와 라벨을 붙이는 의무도 도입된다. 사람을 직접 해치는 용도는 막고, 산업 현장에 들어가는 AI에는 시간을 준 셈으로 읽히는 배치다.
한국의 특별법은 처리 기한을 제도로 못 박은 사례다. AI 데이터센터 사업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통합 창구에서 여러 인허가를 한 번에 신청할 수 있고, 관계기관이 정해진 기한 안에 답하지 않으면 인허가가 처리된 것으로 본다. 이른바 '타임아웃제'다. 심사가 늦어지면 사업자가 기다려야 했던 종전 방식이 뒤집혀, 침묵이 승인으로 바뀐다.
전력 쪽 완화가 더 눈에 띈다. 비수도권에서 일정 규모 이하의 AI 데이터센터를 새로 짓거나 늘리거나, 기존 센터를 AI 전용으로 바꾸는 경우 전력계통영향평가를 면제한다. 이 평가는 대형 시설이 전력망에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 미리 따지는 절차다.
건축법상 승강기·부설주차장·미술작품 설치 기준도 대통령령으로 풀린다. 국내 데이터센터의 60~7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추산을 놓고 보면 분산 유도라는 명분은 분명하다.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평가를 면제한다고 해서 데이터센터가 끌어다 쓸 전력량이 줄지는 않는다. 계산서는 계통 운영과 지역 주민, 나중의 요금 쪽으로 옮겨갈 뿐이다.
미국에서도 결이 비슷한 일이 이어졌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임 행정부가 도입한 AI 안전성 평가·보고 의무를 없앤 것으로 파악되며, 지금은 모델 출시 전 정부 검토 절차를 두는 방안이 워킹그룹 구성 행정명령과 함께 논의되고 있다는 보도가 5월 4일 나왔다. 서명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다.
느슨함과 조임이 한 해 안에 뒤섞이는 국면이라, 기업으로서는 규칙보다 규칙이 바뀌는 리듬을 읽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앤트로픽이 '미소스(Mythos)' 모델을 일반 공개 없이 일부 핵심 인프라 기업에만 제공하는 것도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딥엘이 최근 AWS와 손잡으며 유료 고객에게 자사 서버에서만 데이터를 처리하지는 않겠다고 알린 것 역시, 확장과 약속 사이에서 후자를 조정한 선택이었다.
EU 합의는 공식 승인 절차를 남겨두고 있고, 한국 특별법은 국무회의 의결과 공포를 거쳐 9개월 유예 뒤 2027년 2월 시행된다. 그 사이 타임아웃제의 실제 기한과 전력계통영향평가 면제 기준선은 대통령령으로 정해진다. 법 조문보다 시행령 한 줄이 지역의 전력 사정과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더 크게 흔들 수 있다.
이용자가 체감할 변화는 조용히 온다. 응답이 빨라진 번역기, 끊기지 않는 영상, 더 자주 쓰게 되는 AI 비서 뒤에는 어느 비수도권 부지에 올라간 건물과 그 건물이 끌어 쓰는 전기가 있다. 편리해진 하루의 청구서는 몇 해 뒤 전기요금 고지서나 마을 회의 안건으로 되돌아온다. 그때 무엇을 앞당겼고 무엇을 미뤘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