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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빚은 망치 소리, 백 년 장인의 숨결을 담다

입력 2025. 10. 1. 오후 1:09:25

장인의 강직한 삶이 건축의 서사가 되었다. 문경의 방짜유기 박물관에서 건축은 유물을 보여주는 역할을 넘어, 시련을 이겨낸 한 인간의 삶을 흙과 빛으로 오롯이 되새긴다.

국가무형유산 유기장 이봉주 / ⓒ 국가유산진흥원 사진 서현강
국가무형유산 유기장 이봉주 / ⓒ 국가유산진흥원 사진 서현강

1926년생, 이봉주 유기장의 생애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그는 평안북도에서 익힌 전통 기법을 지켜낸 거의 유일한 장인이었으며, 그의 삶은 1986년 거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담금질하던 쇳조각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는 큰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 대신 망치를 택했다. 손의 감각을 지키기 위해 대수술을 포기하고 열흘 만에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온 일화는 그의 장인 정신을 상징한다. 이러한 우직한 자기 절제와 규칙적인 생활이, 백수(白壽)의 나이에도 그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문경 성요셉 치유마을에 자리한 이 건물은 본래 유기장 전수관의 창고 겸 임시 전시장으로 쓰이던 공간이었다. 설계를 맡은 스튜디오 히치(대표 박희찬, 이동욱)는 이곳을 그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서사적 공간, 즉 박물관으로 재탄생시키는 길을 택했다. 건축의 핵심은 그의 생애처럼 여러 시간을 한 공간에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이 건축은 세 개의 다른 시간을 공간에 담았다. 기존 건물의 붉은 벽돌 외피는 과거의 시간을, 그 안쪽에 쌓은 거대한 흙다짐벽은 장인의 노동으로 채워진 생애를, 그리고 두 벽 사이를 걷는 관람객은 현재의 시간을 경험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간의 층이 공존하며 공간의 깊이를 더한다.

또한 공간 내부는 의도적으로 외부의 빛과 소리를 차단하여 아늑하게 조성되었다. 이는 관람객이 바깥 세상의 방해 없이, 오직 유기의 은은한 빛과 공간이 주는 울림에 깊이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한 건축적 장치다. 이를 통해 방문객은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장인의 시간과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이 공간의 중심을 이루는 흙다짐벽은 스튜디오 히치가 특별히 선택한 건축 방식이다. 흙다짐 공법은 흙과 골재 등을 틀 안에 넣고 층층이 다져 단단한 벽을 만드는 전통 기법이다. 이들은 장인의 정직한 삶과 수만 번의 망치질로 채워지는 작업 과정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기법을 채택했다.

이 흙다짐 공법은 방짜유기 제작 과정의 본질과도 깊이 만난다. 구리와 주석을 78대 22라는 까다로운 황금비율로 합금하고 수천 번의 망치질을 견뎌내야 비로소 신비로운 광채를 갖춘 그릇이 탄생한다. 흙다짐 공법 역시 흙이라는 정직한 재료를 수없는 다짐의 과정을 통해 쌓아 올려야만 하나의 단단한 벽이 된다.

이제 장인의 망치는 공식 보유자인 아들 이형근 장인과 손자 이지호 씨가 물려받아 3대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이 박물관은 유기 너머에 있는 한 인간의 존엄과 계승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결국 이 공간이 전하는 가장 깊은 울림은, 한 사람의 정직한 삶이 시대를 넘어 가장 큰 유산이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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