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성인의 절반 가량이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놓여 있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2024년 6월 만 18세 이상 전국 성인 102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응답자의 49.2%가 장기적 울분을 경험하고 있다고 답했다.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는 비율은 9.3%였다. 이는 2019년 독일 조사에서 나타난 15.5%의 3배가 넘는 수치다.
울분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믿음에 근거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심리학계에서는 이를 외상 후 울분장애(PTED·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라 부른다.
PTSD가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에서 비롯되어 불안과 공포를 주된 정서로 보이는 반면, PTED는 일상에서 겪는 부정적 사건에서 비롯되며 분노, 억울함, 복수심이 주된 정서로 나타난다. PTED는 아직 국제질병분류(ICD)에 공식 진단명으로 등재되지 않았지만, 임상 현장에서 독립된 증후군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연령별로는 30대에서 심각한 울분 비율이 13.9%로 가장 높았다. 심각한 울분을 겪는 이들 중 60%는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울분 수준은 공정성에 대한 신념과 관계가 있었다. 공정성 신념이 높을수록 울분 점수는 낮게 나타났다.
조사에서 한국의 정치·사회 사안별 울분도를 측정한 결과, 입법·사법·행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에 대해 울분을 느낀다는 응답이 85.5%로 가장 높았다.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가 85.2%, 안전관리 부실로 초래된 의료·환경·사회 참사가 85.1%로 뒤를 이었다.
응답자의 47.1%는 지난 1년간 건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했다고 답했고, 삶에 전반적으로 만족한다는 응답은 34.3%에 그쳤다.
울분의 만성화는 개인의 정신건강을 넘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2020년 서울대 연구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피해 단계가 중증인 가구는 PTED 집단에 속할 가능성이 1.7배 높았고, 판정 통보가 지연될수록 그 가능성은 3배 이상 증가했다. 울분은 우울과 삶의 질 사이를 매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명순 교수는 사회 안전과 안정성을 높게 유지하고 사회적 신뢰를 굳건히 하는 것이 개인과 집단의 정신건강을 위하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개인적 차원의 치료·상담 지원과 함께 사회 구조적 해결책을 포함하는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