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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절제의 미학, 경주 최부자댁에서 '오래된 미래'를 만나다

입력 2025. 10. 10. 오후 3:35:34

경주의 가을볕이 교동마을 고택의 담장을 차분히 비춘다. 12대에 걸쳐 약 300년간 나눔과 절제를 실천해 온 경주 최부자댁의 정신이 깃든 ‘하우스오브초이 카페 이스트1779’에서 미래를 고민하는 공예가들의 장이 열렸다.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리는 이 공예 마켓은 2025 APEC 정상회의와 연계된 ‘2025 한국공예전_미래 유산’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다.

2025 한국공예전 〈미래유산_우리가 남기고자 하는 것들에 관하여〉  포스터 / ⓒ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2025 한국공예전 〈미래유산_우리가 남기고자 하는 것들에 관하여〉 포스터 / ⓒ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이번 전시의 주제는 ‘미래 유산 - 우리가 남기고자 하는 것들에 관하여(Heritage for Tomorrow_What we hope to leave behind)’. 과거의 유산을 간직한 공간에서 미래의 유산을 묻는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회복의 언어를 탐색하게 한다.

시대를 앞선 지속가능성, 육훈(六訓)

이곳에서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최씨 가문의 역사는 그 자체로 지속가능한 공동체에 대한 교과서다. 그들의 가훈인 육훈(六訓)은 현대의 언어로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이는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는 절제의 미학이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공동체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강조한다. 또한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않으며 시스템의 안정을 우선했다.

이는 단순한 자선 활동이 아니었다. 부를 독점하지 않고 흐르게 함으로써 지역 경제의 순환을 돕고 시스템 전체의 회복력을 높이는 구조적 접근이었다. 이윤 극대화보다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현대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특히 사회적 책임(S)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최부자댁은 수백 년 전부터 시스템의 지속을 고민했던 것이다.

순환의 미학, 버려짐 없는 지혜

고택의 정신을 이어받은 공간에 펼쳐진 공예품들은 이러한 철학을 조용히 닮아있다. 우리 전통 공예는 본래 자연에서 재료를 얻고, 수명이 다하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을 따른다.

대표적인 예가 조각보다. 옷을 짓고 남은 작은 자투리 천 조각들을 모아 정성스럽게 이어 붙여 새로운 쓰임을 창조한다. 이는 버려지는 것을 최소화하는 제로 웨이스트의 미학이며, 재료에 대한 존중이다. 물건을 아끼고, 고치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 이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전통적 삶의 방식이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유산의 구조

이번 행사는 이러한 전통의 지혜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발전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조망한다. 총 31명(팀)이 참여해 65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는 한국 공예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10월 27일부터 천군복합문화공간에서 열릴 본전시는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파트 1에서는 분야별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해 한국 공예의 정수를 선보인다. 파트 2는 전통 기술과 현대 디자인의 협업 또는 전승을 다루며, 전통이 어떻게 동시대의 언어로 번역되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파트 3이다. 이곳에서는 자원 순환을 모색하는 업사이클 공예가 중심이 된다.

오늘의 언어로 다시 쓰는 미래 유산

현장에서 만난 작품들은 특히 이 세 번째 축, 지속가능성에 대한 공예가들의 응답이다. 산업화와 소비 사회가 남긴 폐기물에 주목한 시도들이 눈에 띈다.

의류 공장에서 버려진 직물 샘플에 전통 쪽빛 염색을 입혀 현대적인 가리개로 재탄생시킨 작품, 깨진 도자기 파편을 옻칠 기법으로 이어 붙여 파괴된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작품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폐어망을 재활용한 섬유로 만든 가방은 쓰레기에서 일상의 예술품으로 변모했다.

이는 쓰임을 다한 사물의 생애주기 전체를 고민하는 공예가의 실천적 태도를 보여준다. 공예는 이제 미학적 탐구를 넘어선 실천적 행위로 확장되고 있다.

‘미래 유산’이란 무엇일까. 기후 위기 시대,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것은 화려한 물건만이 아닐 것이다.

경주에서 확인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절제와 순환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이번 행사는 세계에 선보일 한국적 지속가능성의 원형이 바로 우리 전통 속에 있음을 선언한다. 전통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기능해야 할 가장 오래된 미래다.

[행사 정보] 2025 한국공예전\_미래 유산

주제: 미래 유산\_우리가 남기고자 하는 것들에 관하여

관람 안내: 오전 10시 \~ 오후 7시 (예약 불필요, 정확한 시간 추후 재공지 가능)

1. 본전시

기간: 2025년 10월 27일(월) \~ 11월 30일(일)

장소: 천군복합문화공간

내용: 총 31명(팀) 65점 작품 전시. (파트1: 공예의 정수, 파트2: 전통과 현대의 협업/전승, 파트3: 업사이클 공예)

2. 부속전시

기간: 2025년 10월 27일(월) \~ 11월 30일(일)

장소: 하우스오브초이 1779 SHOP 쇼케이스

내용: 우수 한국공예 작품 쇼케이스

3. 공예마켓

기간: 2025년 10월 10일(금) \~ 10월 12일(일)

장소: 하우스오브초이 카페 이스트1779

문의: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02-398-7936, 7932)

홈페이지: [https://www.kcdf.or.kr/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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