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제로 플라스틱은 말보다 실행에서 더 자주 넘어졌다. 일회용 컵 보증금 같은 제도는 예고와 연기가 반복됐고 시행 뒤에도 혼선이 컸다. 일부 규제는 되돌려졌고 일부는 느슨해졌다. 결국 가게와 시민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고 기업은 설비와 물류에 돈을 넣기 힘들었다. 방향은 맞지만 정책 책상과 현장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이 거리감은 숫자로도 보인다. 재사용 컵과 반납기를 도입한 도시에서 운영이 끊기자 회수 지점이 줄고 참여 의지도 떨어졌다. 제도가 남아 있어도 시스템이 비면 회수율은 금세 내려간다. 이런 좌초 경험이 쌓이면 다음 시도의 정치적 비용이 커지고 정책은 더 보수적으로 변한다. 느린 발걸음이 다시 느려지는 악순환이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수출 시장은 재사용 확대와 독성 정보 공개를 빠르게 요구하고 있다. 뒤따라가면 비용은 우리가 지고 규범은 남의 것이 된다. 필요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운영 표준을 먼저 만들고 공공 조달이 마중물이 되며 규제와 보상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첫째 운영 표준이 핵심이다. 컵 규격과 표시 방법 보증금 처리 세척과 위생 기준 운송 비용 산정까지 하나의 프로토콜로 묶어 국가 표준으로 만든다. 참여 업체가 바뀌어도 시스템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장치다. 표준이 있어야 자본이 들어오고 자본이 들어와야 세척 거점과 회수망이 안정된다. 사업자 의존도가 높았던 과거의 방식은 불안정했다. 이제는 표준 중심 방식으로 전환할 때다.
둘째 공공 조달이 시장을 열어야 한다. 지자체 축제와 공공급식은 연중 반복되는 큰 수요다. 이 영역에서 재사용 용기와 회수 물류를 다년 계약으로 묶고 회수율과 회전수 같은 지표를 누구나 볼 수 있는 대시보드로 공개하면 단가가 빠르게 안정된다. 조달이 안정되면 민간 업체는 장비와 세척 시설에 투자할 근거를 얻는다. 이렇게 쌓인 데이터가 다음 규정의 기준이 된다.
셋째 규제의 신호를 단순화하고 일관되게 만들자. 한쪽에서는 완화하고 다른 쪽에서는 강화하면 시장은 관망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재사용 컵이 일정 회전수를 넘기면 보증금의 일부를 운영비로 돌려주는 방식이 있다. 일회용 사용을 줄인 매장에 조달 가점을 주는 방법도 있다. 금지나 완화 한 가지 신호만으론 확산이 어렵다. 참여를 끌어내는 보상이 함께 있어야 한다.
기업의 숙제도 분명하다. 재활용률 숫자만 강조하는 보고에서 벗어나 새 플라스틱 원료 사용량을 실제로 줄이는 계획을 공개해야 한다. 제품군별 분기 데이터까지 보여주면 신뢰가 생긴다. 유통사는 구매 기준에 재사용 회전수와 첨가제 공개를 포함해 공급망을 정렬할 수 있다. 이런 조합이 커질수록 도시 전역에서 재사용이 일상적인 선택이 된다.
시민이 할 일은 단순하다. 가까운 반납 지점에서 반납하고 가능한 곳에서 리필을 고르면 된다. 중요한 것은 편의와 신뢰다. 반납하면 환급이 제때 돌아오고 세척과 위생이 표준으로 관리된다는 믿음이 쌓이면 참여는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핵심을 다시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슬로건이 아니라 작동하는 규칙과 공개된 숫자다. 운영 표준을 세우고 조달로 시장을 열며 규제와 보상을 함께 설계하면 한국의 제로 플라스틱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