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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악극 '춤바람 분데이', 전통이 현재를 만나다

입력 2025. 11. 14. 오후 7:11:00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국악극 '춤바람 분데이'를 관람했다. 동래학춤을 중심으로 1946년 부산을 되살린 이 작품은 전통 예술이 어떻게 현재와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무대였다.

춤바람분데이 공연 / 국립부산국악원
춤바람분데이 공연 / 국립부산국악원

공연이 시작되자 해방 직후 부산항 고갯길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손수레를 밀며 생계를 이어가던 뒷밀이 이봄이 우연히 동래학춤 명인 김정만의 혼령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무대는 1946년 부산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동래시장, 부산 해안가, 조선소, 범어사, 부산역, 동래 온천장, 영도다리. 부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장소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도시의 기억을 불러냈다. 무대 디자인은 각 장소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과하지 않았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웠던 시대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던 부산 사람들의 모습이 춤과 노래, 대사를 통해 전해졌다.

느린 춤사위가 만드는 학의 품격

무대 위에서 펼쳐진 동래학춤은 굿거리 장단에 맞춰 느리게 움직였다. 흰 도포의 넓은 소매자락이 마치 커다란 학의 날개를 연상시키며, 명주천으로 도포를 만들어 입어 학춤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발을 옮길 때마다 도포자락이 공기를 머금고 부풀어 오르고,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소매가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동래학춤은 1972년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부산의 대표적인 전통 춤이다. 정월대보름날 동래야류나 줄다리기를 할 때 추던 이 춤은 특별한 의상을 따로 만들지 않고 평상시 입던 도포에 갓을 쓰고 춘다. 동래학춤의 무복이 양반들의 평상적인 출입복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춤을 위한 의상이 아니라 일상복이 춤옷이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격식 있고 활동이 불편한 도포가 오히려 동래학춤의 미학을 완성한다는 점이다. 도포는 매우 격식있는 옷차림이기 때문에 그만큼 활동이 불편할 수 있다. 는 제약이 느리고 절제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학의 고고함과 우아함을 표현하는 핵심이 되었다.

'춤바람 분데이'에서 동래학춤은 단순한 전통 춤의 재현을 넘어선다. 극 중 이봄이 학춤을 배우며 변화하는 과정은 춤이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경험임을 보여준다. 손수레를 밀던 뒷밀이가 학춤을 통해 자신의 존엄을 되찾는 장면은 예술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힘을 상징한다.

전통 의상의 놀라운 유연성

동래지신밟기 명예보유자 김준호 명인의 재담이 공연 중간중간 터져 나왔다. 해방 직후 부산 사람들의 언어와 정서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며, 관객들에게 친근함을 주었다. 신동일 작곡가가 전체를 작·편곡한 음악은 전통 장단과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켰다.

공연을 보며 문득 최근 화제가 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사자보이즈가 떠올랐다. 2025년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를 강타한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주인공들이 갓을 쓰고 등장한다. 그런데 같은 전통 의상이 동래학춤에서는 느리고 우아한 춤에, 사자보이즈에서는 격렬한 칼군무에 각각 완벽하게 어울린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자보이즈는 한국 저승사자 복장으로 검은 의상에 갓을 쓰고 'Soda Pop', 'Your Idol' 등을 부르며 강렬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미국 아이튠즈 앨범 차트 1위, 틱톡 한국 차트 1위를 기록하며 K 컬처의 저력을 입증했다. 한국계 캐나다 감독 매기 강은 서태지와 아이들, H.O.T. 등 1세대 K팝을 보고 자랐으며, 작품 속에 저승사자, 호랑이, 까치 등 한국 민화와 전통 설화의 이미지를 녹여냈다.

동일한 전통 소재인 갓과 도포가 이렇게 다른 맥락에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은 한국 전통문화의 유연성과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래학춤의 흰 도포는 느린 템포 속에서 우아함을 극대화하고, 사자보이즈의 검은 의상과 갓은 빠른 비트 위에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전통이 하나의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살아있는 문화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지역 문화유산의 현대적 가치

이 작품의 모티브는 고 문장원(1917~2012) 동래야류 보유자의 구술에서 가져왔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첫 3·1절을 기념하며 1946년 3월 1일 동래야류를 복원해 춤판을 벌였다는 기록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적 인물과 이야기를 더해 만든 이 국악극은 부산의 문화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언어로 재해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갓 모양 키링과 호작도 굿즈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 팬들 사이에서 '비공식 케데헌 굿즈'로 불리며 인기를 끈 것처럼, '춤바람 분데이'를 본 관객들도 동래학춤과 동래야류라는 부산의 무형문화재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다. K 컬처의 글로벌 확산이 역설적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만들어지고 있다.

안경모 연출, 경민선 대본, 김수현·복미경 안무가 만들어낸 무대는 전통과 현대의 균형을 잘 유지했다. 동래학춤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현대 관객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갖췄다.

국립부산국악원은 2008년 개원 이후 영남 지역의 전통 공연예술을 계승하고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춤바람 분데이'는 그 노력의 결실 중 하나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할 때, 전통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닌 살아있는 문화가 된다.

공연장을 나서며 동래학춤의 느린 움직임이 머릿속에 남았다. 학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처럼, 전통 예술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1946년 부산에서 시작된 학춤이 2025년 무대 위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듯이, 전통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명력을 이어간다. 느림과 빠름, 과거와 현재, 지역과 세계를 넘나들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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